[이책어때] 당신이 아픈 이유, 옷장은 알고 있다

박병희 2024. 2. 2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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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화학물질 사용 빈번한 옷
항공사 승무원들 유니폼 입고
피부 발진·호흡 곤란 등 고통
수많은 피해 사례로 주의 당부
불임·면역질환 증가 영향도 주장

미국 화학회사 3M은 1940년대 후반 과불화옥탄산(PFOA)이라는 화합물을 발명했다. PFOA와 같은 과불화화합물로 처리된 옷감은 무게도 가볍고 얼룩과 물을 효과적으로 튕겨낸다. 등산화, 비옷, 스키복, 스노보드복처럼 방수 기능이 필요한 옷감으로 제격이었다. 3M은 PFOA를 듀폰에 판매했다. 하지만 PFOA는 독성 물질이었다. 1961년 3M과 듀폰은 비밀리에 진행한 연한에서 PFOA에 노출되면 각종 암과 선천성 결함, DNA 손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듀폰은 이러한 사실을 숨겼다.

미국 환경 전문 변호사 롭 빌럿이 1999년 듀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PFOA의 위험성이 세상에 알려졌다. 빌럿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로펌 소속으로 듀폰 등 화학회사를 변호했었지만 듀폰이 폐수를 처리한 지역 주변 목장의 소들이 집단폐사하는 것을 본 뒤 고객사를 겨냥했다. 빌럿의 이야기는 2019년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다크 워터스’로 제작됐다. 미국 저널리스트 올든 위커가 쓴 책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에도 언급된다.

책은 미국 저가항공사 알래스카항공 승무원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은 2010년 12월 유니폼 제조업체 트윈 힐이 만든 새 유니폼을 받는다. 하지만 새 유니폼을 입은 알래스카항공 승무원들 사이에서 피부 발진이 생기고 호흡 곤란을 겪는 이들도 나왔다. 트윈 힐이 제작한 유니폼에는 듀폰의 과불화화합물 코팅제인 테플론이 사용됐다. 알래스카항공 승무원들은 2012년 11월 트윈 힐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알래스카항공은 2013년 7월 유니폼 업체를 랜즈엔드로 바꿨지만 트윈힐의 유니폼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위커는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에서 우리가 입는 옷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유해물질이 있으며 이 유해물질이 우리의 건강, 나아가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위커에 따르면 한 벌에 50가지가 넘는 화학물질이 사용되는 옷도 있다. 위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와 연구 결과를 나열하며 주의를 당부한다.

너무나 많은 사례가 이어지다 보니 글쓴이가 지나치게 예민한 것은 아닌지, 지나치게 공포를 유발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정작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게 되는 점은 비슷한 사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화학물질에 의한 피해 사례가 보고된 뒤에도 제대로 후속 조치가 이뤄지거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것이다.

아메리칸항공 승무원들은 2016년 트윈힐의 유니폼 때문에 알래스카항공 승무원들과 비슷한 고통을 겪었고 델타항공, 사우스웨스트 항공, 신타스 등에서도 유니폼 문제가 이어진다. PFOA도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한다. PFOA가 분해되지 않는 데다 기업들이 PFOA와 같은 새로운 과불화화합물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해 화학물질에 의한 사고는 통제가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 새로운 화학물질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으며 유해성 여부를 일일이 따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글쓴이에 따르면 1976년 제정된 미국 독성물질통제법은 무려 6만4000종의 화학물질을 아무런 검사 없이 사용을 허가했다. 미국 환경보호국은 1980년대 이후 사용을 금지한 화학물질이 단 하나도 없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화학물질을 일일이 검사하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 비록 부작용이 있을지언정 새로운 화학물질이 주는 편리함도 크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화학물질에 대한 규제도 느슨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화학물질 안전의 개념은 유해성과 위험성으로 나뉘어 규제된다. 유해성은 화학물질이 지닌 고유의 위험성을 뜻하고 위험성은 화학물질 자체의 위험과 이 물질에 대한 노출 가능성을 조합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수은은 그 자체로 유해성 물질이지만 어린이의 손이 닿지 않는다면 수은을 사용한 온도계는 허용된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은 소비자에게 가해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회사에 미치는 경제적 영향도 생각하는 나라다.

그런 미국에서는 불임 치료를 원하는 여성이 2004~2011년 사이 37% 증가했다. 유산율도 매년 1%씩 늘고 있다. 2017년에는 남성의 정자 수가 지난 40년 동안 50% 이상 급감했다는 논문도 발표됐다. 글쓴이는 이 같은 우리 몸의 변화가 화학물질에 의한 환경 요인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자가면역질환의 증가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화학물질 때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글쓴이는 유해한 화학물질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스스로 이 문제를 더 고민하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며 글을 마무리한다. 글쓴이는 그래도 유독 물질을 확인하고 제거하는 데 신경을 쓰는 신뢰할 만한 브랜드로 H&M, 나이키, 리바이스, 파타고니아, 에일린피서를 추천한다. 오코텍스, 블루사인 등 안전한 화학물질 사용에 관한 인증을 해주는 기관을 참고하고 면, 실크, 대마, 캐시미어, 리네나 양모, 알파카, 레이온, 리오셀, 모달 등의 소재를 사용하는 옷을 입으라고 조언한다. 또 많은 화학물질이 사용되는 드라이클리닝을 피하라고 덧붙인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입는다 | 올든 위커 지음 | 김은령 옮김 | 부키 | 404쪽 | 2만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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