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kg 감량·정신과 상담… ‘내남결’ 강지원·정수민 탄생기
“저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런 순간에도 다른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길이 더 좋을 수도 있고요. 두 번째 기회는 있어야 합니다. 아니, 반드시 주어져야 합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에게 우리 재단이 힘이 되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절친과 남편의 배신으로 망쳐버린 1회차 인생에서 벗어나 행복한 2회차 인생의 문을 연 강지원(박민영)이 유엔케이 사회 환원 재단의 설립을 알리며 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 말은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내남결)의 두 축을 맡았던 배우 박민영과 송하윤의 상황과도 맞아떨어졌다. 각자의 이유로 침체기에 빠져있던 두 사람은 ‘내남결’을 통해 배우 인생 제2막을 열었다.
두 사람은 ‘내남결’에서 각각 2회차 인생을 살게 된 강지원과 지원의 행복을 모두 뺏으려는 정수민(송하윤)을 맡으며 큰 도전을 했다. 박민영은 말기암 환자 연기를 위해 이온음료만 먹으며 37㎏까지 감량해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였고, 송하윤은 처음으로 악역을 맡으며 사랑스러운 얼굴로 가스라이팅을 서슴지 않는 최악의 빌런을 매력적으로 소화해냈다. 캐릭터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던 방법을 묻자 두 사람에게선 공통적으로 ‘나를 없앴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남결’의 종영을 앞두고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민영은 “지원이의 인생 1회차 모습은 세상에 미련이 없는 눈이어야 했고, 삶에 대한 의지가 없어야 했다. 그래서 모든 욕심과 나의 모든 것을, 박민영을 0으로 돌려야 했다”며 “힘을 빼고 아예 긴장이 없는 몸과 걸음걸이를 만들었다. 원래 곧았던 어깨가 이 작품을 하면서 굽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인생 1회차의 메마르고 탁한 눈을 가진 강지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순진한 얼굴 뒤에 숨겨놨던 섬뜩한 눈빛을 드러낼 때, 한껏 떨리는 눈과 얼굴 근육들, 붉어진 얼굴까지.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던 송하윤의 연기는 철저히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접근해 나온 것이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의 소속사에서 만난 송하윤은 “(수민이는) 이해가 정말 하나도 안됐다. 처음엔 원래 연기하던 대로 감정적으로 품었는데, 두드러기처럼 빨간 반점이 올라오고 몸살이 나고 머리가 아파서 미치겠더라. 제 몸이 거부했던 것 같다”며 “이렇게는 절대 이 역할을 못하겠단 생각이 들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 캐릭터의 심리적인 부분을 뼈대부터 공부하고, 프로파일러를 만나 이런 사람의 반응이나 말할 때의 특징들을 들었다. 이번엔 철저히 저와 분리해서 다른 자아를 만들어 살았다”고 되짚었다.
이성적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계산된 연기는 아니었다. 남편 박민환(이이경)과 유지혁(나인우)의 전 약혼녀 오유라(보아)가 외도하는 모습을 본 뒤 내뱉은 “와, 씨”는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대사였다. 대본에도 없었다. 송하윤은 “저도 정수민한테 이용당했다”며 “초반엔 힘들었지만 뒤로 갈수록 몰입하다 보니 오히려 지원이가 이해가 안 되더라. 왜 이렇게 하지? 왜 내 말을 안 듣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배우들의 호연과 ‘사이다’ 전개로 드라마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강지원이 상견례 자리에서 김자옥(정경순)에게 “정신 차려요 아줌마. 당신 아들 그렇게 안 잘났어. 당신이 아니라 내가 이 집안 마음에 안 들어서 결혼 엎는 거야”라고 선전포고한 장면은 통쾌함으로 큰 화제가 됐다. 지난 20일 종영한 ‘내남결’은 최종회 기준 시청률이 전국 평균 12.0%, 최고 13.7%를 기록했고, 역대 tvN 월화드라마 평균 시청률 1위에도 올랐다. 심지어 아마존프라임비디오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글로벌 일간 TV쇼 1위에 오르는 기록도 썼다.
이에 대해 박민영은 “이렇게까지 (시청률이) 잘 나올 줄은 몰랐다. 5~6%만 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0%가 넘고 아마존프라임비디오 1등을 찍는 건 전혀 예상을 못해서 믿기지 않는다”며 “작년에는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웠는데, 이 반응들을 보니 내일이 기대되고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다. 웃음을 잃었었는데 제가 웃고 있더라. 그게 좋았다”고 털어놨다.
전 연인의 횡령 혐의에 함께 휘말리며 곤욕을 치렀던 박민영에게 ‘내남결’의 흥행은 더 큰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에 해가 될까 출연도 망설였던 그지만, 결국 본업으로 사생활 이슈를 넘어섰다. 박민영은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는 없으니까, 잘못한 지점은 인정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며 “20년간 배우 박민영으로 살면서 항상 떳떳했기 때문에 죄송하다고 인사를 제대로 드리고 싶었다”고 말하며 울먹였다. 이어 “인간 박민영과 배우 박민영을 분리해서 봐주시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라며 “(‘내남결’이) 제게 두 번째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젠 정신 차리고 굳건하게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송하윤에게도 ‘내남결’은 배우로서의 권태기를 돌파하게 된 작품이다. 드라마 제작발표회 당시 ‘얼테기’(얼굴+권태기)가 왔었다고 말한 송하윤은 “제가 제 연기와 얼굴에 질려서 ‘얼테기’라고 했었다. 뭔가 갇혀있는 느낌이 들어서 악역도 해보고 싶었다”며 “다른 도전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와야 할 수 있는 건데, 그때 딱 수민이를 만나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회상했다.
처음 해보는 악역에 센 대사도 많아 배역을 수락하기까지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에겐 여러모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그의 연기 인생을 통틀어 캐릭터를 정의 내리지 못한 채로 끝난 것도, 배역으로서의 자아를 분리해본 것도, 주변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주 몰입해본 것도 ‘내남결’이 처음이었다. 송하윤은 “수민이 덕에 용기가 많이 생겼다. 후회하더라도 도전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생겼다”면서도 “자아를 분리해서 연기했다 보니 되게 친한 친구랑 매일 같이 있다가 갑자기 끊어내고 온 느낌이라 유난히 마음이 쓰인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두 사람은 이번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향후 더 다양한 연기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송하윤은 “지금의 수민이는 작년의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악역이었다면, 수민이를 품고 시간을 보낸 뒤의 악역은 또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연기의) 세계관이 넓어져서 다른 캐릭터로도 빨리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박민영은 “30대 후반이 되니 직접 겪은 걸 토대로 다양한 감정이 올라오더라. 제게도 어두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연기도 할 수 있었다”며 “더 풍부하게 연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 앞으로 배우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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