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24시간 공사"…일본 양배추밭, 실리콘밸리 됐다 [구마모토 TSMC 공장을 가다]
“원래 여기 전부가 양배추밭이었어요. 그런데 2년 넘게 24시간 공사하더니 완전히 달라졌어요.”
22일 오후 일본 구마모토(熊本) 공항에서 만난 택시 운전사가 하얀색 건물을 가리킨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회사인 대만 TSMC가 1조2000억 엔(약 10조8000억원)을 투자해 세운 일본 내 첫 공장이다. 최근 시험 가동에 들어간 이곳은 올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카메라·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12~18 나노급(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반도체를 생산한다.
지난해만 해도 대형 크레인만 보이던 이곳은 불과 일 년 만에 확 달라졌다. 대형 가림막이 쳐져 있던 곳엔 일본법인 명칭인 'JASM' 간판이 세워졌다. 공장 부지(약 21만㎡)는 도쿄돔 5배 크기에 달해 차로 돌아봐야 할 정도로 웅장했다.
정문 앞으로 다가가자 사무동 입구에 놓인 축하난 수십 개가 눈에 들어왔다. 소니그룹 등 일본 회사들이 오는 24일 준공식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것들이다.
한쪽에선 안전모를 쓴 작업자 대여섯 명이 행사장 무대를 부지런히 설치하고 있었다. TSMC 창업주 모리스 창(張忠謀)은 물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사이토 겐(齋藤健) 경제산업상 등을 필두로 일본을 대표하는 주요 인사들이 준공식에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본 왕실의 아이돌’로 불리는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질녀 가코(佳子) 공주도 준공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번 준공식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약 1700명. 주변에 식당이 전무해 TSMC는 직원들을 위해 대로변에 맞닿아있는 사무동 건물 1층 한 면을 전부 직원식당으로 꾸며놨다. TSMC 공장 옆엔 수확이 끝난 양배추밭이 펼쳐져 있다. 택시 운전사는 “바로 이곳에 제2공장이 들어올 거란 말이 돌면서 땅값이 많이 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하듯 길 곳곳엔 ‘사업용 토지 매매 임대, 구마모토의 발전을’이라고 적힌 광고판이나 ‘신축건물 호평분양’이란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새로운 '실리콘 아일랜드'로 변신
지난해 10월 기준 대만에서 이주해온 이들은 약 770명. 구마모토현은 이들을 위해 별도 통역사를 두고 외국인 학교를 확충하고 있다. 기쿠요마치 사무소 직원은 “인구 4만3000여 명의 작은 마을이 TSMC 공장으로 확 달라졌다”며 활짝 웃었다.
‘TSMC 효과’는 확연했다.구마모토현의 8개 공업단지엔 빈 곳이 사라지면서 공장 용지가 부족한 상황이 됐다. 그러다 보니 같은 구마모토현에 있는 야마가(山鹿)시는 최근 30년 만에 처음 공업 용지를 정비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파급 효과 때문이었다.
실제로 구마모토현에 따르면 지난 2022년에 구마모토로 온 기업은 총 61곳, 지난해에도 63개 회사가 구마모토를 찾았다. 상당수가 반도체와 관련된 회사로 일부 회사는 TSMC 납품을 위해 폐교를 빌려 사업장으로 사용할 정도로 기업 쏠림이 높아졌다.
일본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부품·장치(소부장) 부문에선 세계 정상급이다.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재) 등 단 한 품목으로 세계 시장 점유율이 90%를 넘는 ‘온리 원’ 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일본이 한국과 외교적 갈등에 무기로 사용한 것도 ‘소·부·장’일 정도였다.
이는 TSMC 공장 주변에서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세계 5대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도쿄일렉트론 공장과 스마트폰 등에 탑재하는 이미지 센서 시장에서 세계 1위인 소니의 거점 공장이 지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구마모토현 관계자는 “올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공장 가동에 들어가고, 제2 공장 착공이 시작되면 구마모토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일본의 '신(新) 실리콘 아일랜드'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투자만 해라” 일본의 반도체 굴기
구마모토를 포함한 규슈(九州) 지역은 1980년대만 해도 ‘실리콘 아일랜드’로 불릴 정도로 일본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생산지였다. 일본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50%를 차지할 정도로 호령을 떨치던 때, 구마모토 역시 반도체가 주된 산업이었다.
하지만 후발주자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앞세운 한국, TSMC가 있는 대만에 추격당하면서 약 40년 만에 일본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10%대로 고꾸라졌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중반에 여러 기업들이 연합한 형태의 이른바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 프로젝트가 정부 주도로 가동됐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봤다.
일본이 외국 기업에 자존심을 굽히고 50년 넘는 규제를 푸는 등 파격적인 조건으로 공장 건설을 제안한 것은 그만큼 대내외적인 상황이 급박해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 새로운 산업이 확대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첨단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데 일본의 반도체 생산 기반은 무너져내린 아찔한 상황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가 경제안보의 핵심으로 떠오르면서 일본 정부가 직접 팔을 걷어붙인 셈이다.
TSMC의 첫 반도체 공장을 일본에 유치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전체 투자금의 절반에 가까운 4760억 엔(약 4조3000억원)을 지원했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TSMC가 2027년 말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에 지을 예정인 제2공장엔 일본 정부가 제1공장보다 더 많은 약 7300억엔(약 6조5000억원)을 지원할 방침이다. 현금 지원 외에 농지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규제까지 풀어주면서 일본이 내건 조건은 세 개. ‘10년간 철수하지 않을 것과 제조장치와 소재의 절반 이상은 일본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것, 그리고 반도체 공급이 어려운 상황에는 증산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 정부의 총력 지원엔 반도체 공급망 확충, 반도체 산업의 부활이란 복안이 깔려 있다. 일본의 반도체 자급률은 지난 2022년 기준 5%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코로나19 시기엔 반도체 부족으로 일본의 주력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생산에까지 차질을 빚자 일본 정부는 ‘자국 내 생산’을 최우선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TSMC를 유치하며 '증산'을 내세우고, 제2공장에 도요타가 2% 지분 투자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율주행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처를 확보하겠단 의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반도체 자급률이 2031년엔 약 44%까지 올라갈 것”이라며 “규슈를 중심으로 반도체 부품 소재, 장치 공급망도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TSMC 경제효과 177조원
파격적인 조건에 TSMC와 구마모토의 밀월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2027년 가동을 목표로 한 제2공장까지 포함하면 총 200억 달러(약 26조7000억원) 투자가 이뤄지는 셈인데 일본 정부는 제2공장에도 지원금을 약속하고 나섰다. 일본 정부의 보조금이 전체 투자금의 3분의 1 수준에 달할 것이란 보도도 나온다.
정부가 앞장서 보조금 약속을 하고 나서는 데엔 TSMC 공장 유치가 가져올 경제 효과가 더 크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규슈경제조사협회는 TSMC 유치로 오는 2030년까지 약 20조 엔(약 177조원)의 경제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구마모토현 관계자는 “총 20조 엔의 경제파급 효과 가운데 절반인 10조 엔(약 88조4700억원)이 구마모토가 누릴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고 설명했다.
구마모토=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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