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시신 공개 시간 끄는 러시아…추모객엔 입영통지서
러시아 당국이 옥중 의문사한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시신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시신을 돌려 받기 위한 가족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에 따르면 나발니의 어머니 류드밀라 나발나야는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며 러시아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야말로네네츠 자치구에 있는 살레하르트시(市) 법원은 나발나야로부터 당국의 행위에 대한 항의를 담은 소장을 접수했다. 시 법원은 소장 심리가 다음달 4일 비공개로 이뤄진다고 전했다.
나발니 시신 양도, 내달 4일 심리
앞서 나발나야는 20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나발니의 시신을 즉시 돌려달라”고 공개 호소했다. 하지만 당국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법적 절차에 들어갔다.
당초 러시아 수사위원회는 “시신은 최소 14일 동안 화학적 검사를 마쳐야 한다”면서 유족들의 시신 인도 요구를 거절해왔다. 나발니가 교도소에서 사망한 건 지난 16일로, 법정 심리가 시작되는 다음달 4일이면 사망 17일째가 된다. 수사위가 제시했던 2주보다도 늦은 데다, 법원 판단이 빠르게 내려질지도 의문이다.
나발니의 유족은 러시아 고위 당국이 나발니의 죽음에 연루돼 있다고 믿고 있다. 나발니의 아내 율리아 나발나야는 “(남편의 죽음은) 크렘린이 명령한 살인이며, 시신 공개를 미루는 것은 증거 은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나발니의 시신 행방도 불분명하다. 모친 나발나야는 나발니 사망 이튿날인 17일 살레하르트 병원 영안실과 해당 교도소 등을 직접 찾아갔지만 시신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러시아 인권단체 ‘굴라구.넷’의 창립자인 인권운동가 블라디미르 오세크킨은 “푸틴의 특수 부대가 그의 시신을 화장할 위험이 매우 크다”고 영국 매체 더타임스에 전했다.
이와 관련 이양구 전 우크라이나 대사는 “러시아 당국이 나발니의 시신 공개를 미루는 것 자체가 자연사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강조했다. 이어 “크렘린은 유럽의 ‘뮌헨 안보회의’ 기간에 맞춰 나발니의 죽음을 알림으로써 서방을 겁박하고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서방을 각성시키고 대러 제재 및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당위성을 부각했다”면서 “시신 공개 여부와 상관없이 나발니의 죽음은 이미 순교가 됐고, 푸틴 정권의 한계를 상징하는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실제 러시아 국내 여론이 심상치 않다. 러시아의 언론·인권단체인 OVD인포는 당국에 나발니의 시신을 가족에 넘겨 달라고 요구하는 청원서 서명 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현재 러시아인 7만7000명이 서명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EU·英·加·美 “나발니 시신, 유족에 인도” 촉구
국제 사회도 나발니 시신을 유족에 인도하라며 러시아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나발니 사망에 대한 독립적인 국제 조사를 허용하고 그의 시신을 유족에게 조속히 돌려주라고 러시아 정부에 촉구했지만, 크렘린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캐나다 정부는 자국 내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나발니 사망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러시아 정부 차원의 투명한 조사 및 유족에게 지체 없는 시신 양도를 요구했다. 또 외교부 성명을 통해 “나발니의 인권을 박해한 자들을 이미 제재했다”면서 “그의 죽음에 책임있는 관련자를 규명하는 대열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 당국은 나발니의 죽음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면서 나발니가 생전 수감됐던 교도소 관리자 6명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다. 이들은 영국에 입국할 수 없고, 영국 내 자산이 동결된다. 나발니 사망과 관련한 제재는 영국이 최초다.
아울러 영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 나발니의 사인에 대해 투명한 조사를 실시할 것과 그의 시신을 즉각 가족에게 인도하라고 촉구했다. 미국도 러시아에 대한 중대 제재를 예고한 상태다.
러시아 정부는 자국 내 나발니 추모 물결을 잠재우고 반체제 세력 부활의 싹을 자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날 모스크바타임스는 나발니를 추모하다 경찰에 체포된 시민 400여 명 중 최소 6명이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고 전했다. 한 남성은 “경찰이 석방 2시간 전 입영통지서를 나눠주고, 서명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부러뜨린다고 협박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연방대법원은 오는 3월 대선에서 유일한 ‘반(反) 푸틴 인사’인 보리스 나데즈딘의 대선 출마를 금지한 판결을 유지했다. 의문사도 이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아우디우카를 점령하면서 병력 1만6000명과 장갑차 300대를 잃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던 러시아 군사 블로거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현지 매체는 극단적 선택으로 보도했다.
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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