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집 앞 철거 현장에서 만난 네 번의 계절
도서관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입니다. 20대(Z), 30대(M), 40대(X)까지 총 6명의 여성들로 이뤄진 그룹 'XMZ 여자들'은 세대간의 어긋남과 연결 그리고 공감을 목표로 사소하지만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글로 씁니다. <편집자말>
[한재아 기자]
4년 전(2020년) 봄, 평화롭기만 했던 일상에 달갑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공사는 2026년에 35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한 아파트 단지로 완공될 예정이란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할머니네 집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따스한 햇빛을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꽤 넓었던 주택 단지가 사라지는 데 걸린 기간은 약 2년 정도였다. 공사가 진행되는 구간은 바로 앞 맞은편 주택가까지여서 한동안은 흉하게 박힌 철제 판자들을 보며 집을 나서야 했다. 가끔은 옥상으로 올라가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구경했는데, 생각해보면 살면서 커다란 중장비를 3m 안팎의 거리에서 볼 일이 또 있을까 싶다.
하루는 맞은편에 있는 3층짜리 주택을 철거하는 날이었다. 작은 마당과 파란 지붕이 인상적이었던 3층집. 흩날리는 흙먼지와 널브러진 잔해들을 치우는 굴착기의 버킷을 보고 있으니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1층에 있는 이웃할머니네에서 친한 동생과 같이 간식을 먹거나 TV를 보며 놀기도 했고, 2층에 살던 가족분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운동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살았던 공간의 흔적을 말끔히 치우니 남은 것은 오직 흙뿐이었다. 앞으로 사람들은 이 자리에 어떤 모양의 집이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주택가 사이에 있는 넓은 골목길이 어떤 곳이었는지도.
자전거를 배우던 아이의 웃음소리와 산책을 하며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 담벼락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가던 길을 멈추고 담소를 나누던 어르신들까지.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봐았던 모습들이 이제는 기억 속에 남아 영원히 멈춰 있을 거라는 사실에 조금은 씁쓸해졌다.
그날 이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었기에 건물이 무너지는 소음과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일상을 보내야했다. 작지 않은 소리가 오전 내내 들려오는 건 스트레스였지만 하필 코로나와 시기가 겹칠 때였어서 선뜻 집 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때문에 한동안은 핸드폰 알람 대신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우리 집과 가까운 곳부터 철거를 시작해 남은 1년 6개월 동안은 흙먼지와 조금은 멀어졌다. 철제 판자를 치운 자리에는 낮은 펜스가 세워진 덕분에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곳에 자리 잡은 자연을 마음껏 구경하기도 했다.
네 번의 계절이 남긴 것
▲ 가을 |
ⓒ 한재아 |
점점 추워지는 날씨 때문인지 이르게 내린 첫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시간이 지나 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에 눈이 녹은 지 한참이 지나도 공사장의 눈은 녹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까지 그곳은 여전히 하얀 세상이었다.
▲ 겨울 |
ⓒ 한재아 |
높아지는 온도와 따스한 햇살에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던 눈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다. 새로 만들어진 수영장을 찾은 청계천의 오리 가족들이 물장구를 치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주변에 작동을 멈춘 중장비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풍경이었다.
▲ 이른 봄 |
ⓒ 한재아 |
▲ 여름 |
ⓒ 한재아 |
앞으로 만들어질 높고 커다란 아파트 단지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지든 어렸을 때의 기억과 이 자리에서 만난 네 번의 계절보다 아름답지는 못할 것 같다. 벌써부터 집을 나서며 봤던 탁 트인 하늘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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