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여순 감옥 내 단재 신채호 선생 소개글 여순감옥에서 분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감동에 있는 소개글. 단재 선생의 수감 옥사는 명확히 있지 않지만 감옥 안에 단재 선생의 기록을 남겨 그의 역할을 기리고 있다 |
ⓒ 조창완 |
박자혜(朴慈惠). 향년 24살, 3·1혁명 때 서울에서 간우회사건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루고 풀려나 봉천을 거쳐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당시 옌칭대학 의학과에 재학중인 당찬 여성이었다. 그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기도 하였다.
7살 때에 궁궐의 조 대비 처소에 애기나인으로 입궐하여 조 대비 사후 윤 대비 처소로 옮겼다. 국치 직전 윤 대비의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숙명여학교 의예과에 입학하여 2회로 졸업하고, 총독부가 세운 적십자병원 간호원으로 일하면서 동료들과 3·1혁명에 뛰어들었다. 서울시내 국·공립병원 의사와 간호원들을 규합하여 태업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투옥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감시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과격하고 언변이 능한 자. 총독부 의원·간호사 모두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한 주동자."
신채호는 당시 40살의 홀아비.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망명객, 거기에 비사교적이고 성마르며 살갑지 않은 성품, 누가 봐도 결혼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은 중년 남성이었다.
박자혜는 신채호를 익히 알고 있었다. 국내에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그리고 <신여성> 등에 쓴 그의 글을 읽었고 그동안의 행적도 바람결에 들었다. 해서 금방 맘을 열었다.
"금강산 단풍구경보다 몽고 사막풍에 흉금을 펼치고 싶다"던 그 사람이 아닌가. 해서 우국지사와 애국여성이 중국 베이징에서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1920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박자혜가 맘을 여는 날 남편 될 사람의 말이 이랬다.
"나는 가정에 등한한 사람이니 미리 그렇게 알고 마음에 섭섭히 생각마시오."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치하는 남자와 그런 사내를 마다하지 않은 여성의 조우였다. 운명과 숙명 사이에서 조우한 두 사람의 '부부의 연'은 그러나 부박한 세상 좀팽이들의 백년가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엄숙하고도 순정한 노력으로 저 분을 내 낭군으로 섬기리라."
▲ 단재 선생이 머물렀던 석등후통 베이징 신화사 근처에 있는 이곳에서 단재는 가족을 보내고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집필과 언론 활동을 펼쳤다. |
ⓒ 조창완 |
베이징 북성(北城) 사두호동(沙頭胡同)의 싸구려 셋집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신채호 부부는 1921년 1월 맏아들을 낳았다. 수범(秀凡)이라 이름 지었다. 가족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천고>라는 잡지를 내고 <이승만 성토문>을 쓰고 했으나 돈이 생기는 것도, 밥이 나오는 일도 아니었다. 아내가 잘 견뎌주는 것만도 여간 고마운 일이었다.
"단재 선생님, 저 아기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가렵니다. 조선의 아이를 이역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서요."
아내는 생활고를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남편과의 소중한 핏줄을 남의 나라에서, 남의 말을 배우며,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은 것이 박자혜의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혼인 하기로 한 날의 말이 떠올랐다.
"가정사에 등한히 하더라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박자혜는 1922년 여름 두 살난 아들 수범이를 데리고 귀국길에 올랐다. 친가나 시가나 마땅히 의탁할 곳이 없었지만, 떠날 때 대책없이 남편의 "제 나라 말과 풍속을 익혀야 한다"는 말이 서운하기 그지 없으나, 너무나 지당한 말을 가슴에 안고, 결혼 2년여 만에 남편 곁을 떠나,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발길을 고국으로 돌렸다.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낸 날 신채호는 온 종일 꼼짝하지 않았다. 민족·독립·역사…. 여러가지 추상의 낱말들이 떠올랐다가 사그라지기를 반복하였다. 그동안 친숙해진 절망이라는 감정이 이날 따라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분하고 비통한 심사가 마음을 헤집기도 했다. 그리고 왜 착한 아내를 좀 더 살갑게 대하지 않았던지, 아삼아삼 후회되고 그리움이 솟구쳤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날까….
▲ 단재 선생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베이징 진스팡지에 단재 선생이 세들어 살던 집은 지금 봐도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박자혜 여사와 단란한 생활을 꾸리고, 아들 수범씨도 낳았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지 않아 가족을 고국에 돌려보내야하는 처지가 됐다 |
ⓒ 조창완 |
그러나 박자혜는 한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아들이 영양실조로 시름할 때에도, "네 아비는 훌륭한 사람이란다. 원망하지 말고 잘 자라나거라."라고 달랬다.
박자혜는 극심한 가난과 자식의 병고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간여하였다. 남편도 개입한 의열단원 나석주 의거를 도운 것이다. 1926년 12월 나석주가 서울에 들어와 수탈기관 조선식산은행과 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질 때, 두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를 은신시켜 주었다. 황해도 출신인 나석주 의사가 서울지리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무렵 신채호는 아나키즘에 심취하면서 정신은 더욱 명료해지고 사상의 갈래는 대초원같이 끝없이 펼쳐지는 듯 하였다. 지적인 즐거움도 쏠쏠했다. 틈나는 대로 세계적인 아나키스트들의 저서를 찾아 읽었다. 지배가 없고 특권이 주어지지 않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나키즘 외에 달리 방략이 없는 듯 하였다. 1925년 경부터 유자명의 소개로 알게된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林炳文)과 서울에서 온 이지영(이필현)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도 투철한 아나키즘 신봉자였다.
신채호는 역사 저술과 아나키즘 단체의 활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베이징 외곽 보타암에서 '비승비속'의 처지로 언제까지 절간 신세를 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베이징 외각에 방을 구해 혼자 기거하였다.
식생활이 부실한 데다 각종 사료를 뒤지고 밤낮 가리지 않고 글을 쓰다보니 시력이 크게 나빠졌다. 안질이었다. 실명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여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시력이 더 나빠지기 전에 당신과 아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소."
염치없는 남편이었다. 조국해방운동도 좋고, 역사연구도 좋지만, 아내와 아들은 이게 무슨 꼴인가. 그렇다고 여비라도 보내주면서 만나고 싶다는 편지라면 또 모를까…. 서울에서 베이징까지 불원만리 길이 아닌가. 그래도 편지를 받은 박자혜는 마냥 즐거웠다.
"남편을 만난다니…."
남편이 고국으로 들어올 수 없는 처지이니, 아내가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늘 감시하는 종로경찰서 형사를 따돌리기 위해 머리를 썼다. 시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충청도 대덕으로 가는 것처럼 이웃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어렵게 노자를 마련하여 기차로 국경을 넘었다. 독립운동가 가족이 사는 마을에는 경찰에서 박아논 고첩들이 있어서 언행이 수시로 총독부에 보고되었다.
1928년 초 박자혜는 어느새 8살이 된 아들과 함께 '남편 찾아 3만리'길에 올라 베이징에 도착했다. 7년 만의 재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많이 쇠약해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반가움 보다는 복바치는 설움이 부부를 끌어안게 만들었다. 몰라보게 자란 아들 수범이가 뜨악한 표정으로 아비라 불리는 중늙은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 순간 부부는 다시 한 번 울컥 가슴이 매었다.
"저 어린 것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신채호 부부는 생활고와 독립운동의 일로 2년여 만에 다시 헤어져야 했다. 박자혜는 어린 아들과 뱃속에 아이를 품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것이 이승에서 마지막이 된 생이별이었다.
신채호는 1928년 베이징에서 <탈환>·<동방>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동방무정부주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조직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일경에 피체되고, 10년 형이 선고되어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인(囚人)이 된 신채호는 가끔씩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박자혜는 밀린 집세 등 어려움을 넋두리삼아 남편에게 호소했더니, "정 할 수 없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라는 답신이었다. 아내나 남편이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다.
신채호가 투옥 8년 만인 1936년 2월 뇌일혈로 위독하다는, 뤼순형무소에서 박자혜에게 전보로 알려왔다. 출옥 후 그의 활동이 두려운 일제가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따른다. 박자혜의 통절한 '제문'에서 저간의 사정을 살피게 한다.
단재의 사후 둘째 아들 두범이는 1942년 15살 때에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숨지고, 첫째 아들 수범이는 어렵게 한성상업학교를 나와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 만주로 떠나고,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던 박자혜는 조국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10월 16일 단칸 셋방에서 외롭게 숨졌다. 유해는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2008년 박자혜의 위패를 남편의 묘소에 안치함으로써 사후 27년 만에 남편 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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