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되면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김형욱 2024. 2. 2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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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빌>

[김형욱 기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빌> 포스터.
ⓒ 넷플릭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나치 독일 치하의 벨기에 안트베르펜, 두 젊은 벨기에 경찰이 사건에 휘말린다. 상관이 지시하길, 벨기에인과 독일인의 중재자라는 걸 인지하고 명령에 철저히 따르며 방대한 훈련을 잘 되새기라고 한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지시하길, '가만히 서서 구경하라' 하나만 기억하라고 한다.

빌과 로더는 상관의 말을 새기고 길을 나서는데, 한 독일 야전 헌병이 말을 걸어온다. 체포 대상인 노동 거부자들의 주소를 건네며 앞장서 안내하란다. 그들은 함께 가서 일가족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헌병이 죽이려 하자 젊은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다. 따라가는 헌병, 젊은 여자를 폭행하고 달려온 아버지가 대신 맞다가 급기야 로더가 말린다. 헌병이 로더를 죽이려 하자 빌이 헌병을 죽인다.

다행히 비가 억수로 내리는 밤이라 잘 수습한 편이지만 다음 날 독일 야전 헌병의 행방불명 소식이 일파만파 퍼진다. 상부에선 곧바로 내부 조사를 끝낸 뒤 '빨갱이'들을 처형한다. 그들이 헌병을 죽였다고 본 것이다. 하필 빌과 로더가 호위 명목으로 같이 간다. 치가 떨리는 경험 후 빌은 아버지와 함께 후원자이자 큰 권력을 가진 페르스하펄을 찾아 뒷수습의 도움을 청한다.

한편 로더의 누나 이베트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로더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빌과 함께 행동하려 하자 그를 직접 초대해 신상을 조사해 보려 한다. 의기투합하는 세 사람, 하지만 빌은 유대인 박멸에 앞장서는 페르스하펄과 계속해서 만난다. 또한 빌은 독일 헌병의 위협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일가를 숨겨 주기도 하는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과연 빌은 혼란스러운 시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 또 다른 구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빌>은 안트베르펜을 배경으로 하는 벨기에 영화다. 벨기에 영화 하면 <제8요일> 등의 자코 반도르말도 유명하다지만, 영화 역사에 남을 거장 다르덴 형제가 홀로 떠받들고 있는 형국이다. 와중에 <빌> 같은 영화의 출현은 신선하고 반갑다. 그것도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가 배경이라니.

빌과 로더는 같이 행동하지만 완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로더는 누나 이베트를 비롯해 가족 전체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베트는 확고한 신념으로 격렬한 활동을 이어간다. 반면 빌은 유대인 가족도 숨겨 주고 이베트와 사귀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치 고위급 인사의 직접적인 회유와 협박에 흔들린다.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대응하려는 자, 변절하는 자, 흔들리는 자 등 다양한 면모가 보인다. 빌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되라고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얼떨결에 대응하려 했다가, 변절하라는 협박을 받아 흔들리고 있던 와중에 큰 변고를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을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로만 생각하곤 하는데 들여다보면 대다수가 빌과 같은 루트를 겪지 않았을까 싶다.

'어쩔 수 없음'에 매몰된다는 것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내레이션이 나온다. 아무래도 빌이 훗날 그때를 돌아보며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역사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진정한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모른다. 일이 벌어지고 나면 사람들은 항상 비난한다. 근데 당사자가 되면, 내일 상황을 짐작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영화의 끝지점에선 '어쩔 수 없었어'라며 자조한다.

역사를 제3자의 입장에서, 시공간을 한참 떨어져 바라보는 게 아니라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떨어져 당사자가 되어 생존을 빌미로 이리저리 휘둘리면 그 누구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했든 비난할 수 없다고도 말한다. 반박불가 맞는 말이지만 변절자를 옹호하는 빌미도 제공할 수 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살든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게 아닌가. '나 때는 너무 힘들어서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었어'라며 '지금은 살기 좋으니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잖아'라고 뭉뚱그려선 안 되는 것이다. 상대적인 게 아닌가. 살기 좋다는 지금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지금은 없는 좋은 무엇이 옛날에 있었을 것이다. 옛날이라고,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모든 게 어쩔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 테다.

진정한 역사는 직접 보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지만, 직접 보고 겪어 진정한 역사를 접했다고 해서 잘못이 감춰지거나 '어쩔 수 없음'에 매몰되어선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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