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과 학문과 풍류의 도학자 이황

김삼웅 2024. 2. 21.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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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94] 낭만과 자연을 즐기고 멋을 아는 풍류객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이황 초상 일제강점기, 25.2x30.3cm, 퇴계서원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던 시기에 남명 조식과 같은 해,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은혜리)에서 진사 이식(李植)과 박씨 부인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취 부인 의성 김씨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고 29살에 세상을 떠나자 후취 부인 춘천 박씨를 얻어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퇴계는 박씨 부인이 낳은 막내아들이다. 

2살 때 아버지가 별세하여 숙부에게 글을 배웠다. 19살 때에 서울로 올라가 문과별시 초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27살에 경상도 향시 진사시 생원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조숙한 천재형이 아니라 대기만성형에 속한다. 그 사이 허씨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으나 아내가 일찍 사망하고 29살 때에 안동 권씨와 재혼하였다. 32살에 문과별시 초시에 합격하고, 34살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간 이황은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홍문관수찬, 형조정랑, 홍문관 교리, 경기도어사, 사헌부지평, 의정부검상, 충청도어사, 사헌부장령, 홍문관직강, 홍문관응교(정4품), 대사성 등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초·중년기에 조선시대 일반 관료와 다름없는 평범한 관리의 길을 걸었다. 관리로서 외직과 내직을 오가면서 나라 일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행보에는 남다른 점이 많았다. 19살 때에 한 번 만났던 조광조를 생각하면서 도학의 정도(正道)를 찾아 이 길을 걷고자 한다. 조광조는 국정의 일대 개혁을 시도하다가 훈구파에 몰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어느날 조광조의 종손 조충남이 이황을 찾아와 조광조의 행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9살 때에 만나보았던 그의 기상을 사모의 정을 담아 지었다. 조광조는 젊은 이황이 그리던 멘토였다. 이황은 64살 때에 조광조의 행장을 다시 지었다.

 대궐 계실 적 봉황같은 풍채 항상 사모했는데
 이제 후손이 오시니 그 모습 생각나네
 성대한 아름다움 떨쳐냄을 내 어찌 감당하리
 천리 눈밭 길 찾아온 그대에게 부끄럽구려.

이황이 관료생활을 할 때 조광조와 사림파는 반체제의 '역당'들이었다. 그의 문집이 불태워지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떼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마음 깊숙이 도사린 조광조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기묘사화, 을미사화, 을미왜변, 임꺽정의 난 등 사화와 국정난맥 등이 잇따르던 시기였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이황은 41살 때에 중종에게 언로(言路)의 자유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광조가 주창하고 실천하려던 과제이기도 했다.

이황의 생애는 전반기 관료 시절과 퇴임하여 낙향한 후반기로 크게 분류된다. 46살에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로 정하고 홀연히 관계를 떠났다. '퇴계'라는 호는 물러남과 더불어 향리 온계리(溫溪里)에서 따왔다. 퇴계는 이후에도 종종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몇 차례 출사를 하기도 했으나 잠시 머물다 다시 물러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성질이 고결하여 속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벼슬을 하더라도 고을의 수령이나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라고 한 말에서 퇴계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이황이라는 이름이 관리시절의 상징이라면 퇴계라는 호는 전원·유람·학문·유유자적의 '퇴계정신'을 의미한다. 그는 상명하복과 고정된 틀에 묶이는 관리생활이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해서 여러 차례 사직을 하고 귀향 또는 칩거를 시도했다.

귀향한 그는 태어나 자란 온계리 양곡의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지산와사(芝山蝸舍)'라는 당호를 걸었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시를 지었다. 

지산기슭 끊어내어 새집 지었더니
모양은 달팽이 뿔 같아도 몸은 감출 수 있네.
북쪽 낭떠러지 마음에 안 들지만
남쪽은 봄 안개 감돌아 운치 더하네.
아침 저녁 원근의 산천은 보기 좋고
뒷산은 그런대로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네.
달과 산을 보는 꿈 다 이루었으니
이밖에 또 무엇을 더 구하리오. 

그는 주자학자이면서도 낭만과 자연을 즐기고 멋을 아는 풍류객이었다.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면 개천에 비치는 달을 보고, 여울 소리에서 생의 환희를 느꼈다. <음귀영계월(飮歸詠溪月)>이라는 제목의 시다.

달을 밟고 돌아올 때 서릿발 하늘에 가득하고
국화 핀 그 자리 옷깃에 향기 남았네.
그 중에 달리 마음 깨워 주는 곳이란
여울 소리 맑게 울려 거문고를 뜯는 듯.

이황은 낙향하여 시 짓고 산행하는 등 한가만 즐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관리들의 탐학이 심해지고, 흉년이 거듭되면서 사방에서 도적 떼가 날뛰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거국이 소동하여 거꾸러진 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자는 끊이지 않도다. 이제 흉년은 계속되어 백성은 먹을 것이 없고 목화도 전혀 없으니 백성은 무엇으로 몸을 가리울까. 기한이 몸을 베이건만 백성은 도움받을 곳이 없으니 모두가 보따리를 싸서 돌려메고 나서기 마련이다. 

혹리(酷吏)는 인연작간(因緣作奸)하여 위협과 침독이 급하기 성화같아 살을 벗기고 뼈 속까지 후려침을 그칠 줄을 모르니 무지한 백성들이 위로 덕을 보지 못하고 아래로 침해만 당하게 되어 서로 원망하고 슬퍼하여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처자의 사랑을 끊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찾아가지만 그곳도 마찬가지. 사방이 탕탕하여 안도할 곳이 없어 강장은 군집하여 도적이 되고 노약은 도랑에 떨어져 죽으니 슬픈 일이라. 

그는 사군자를 좋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매화를 사랑했다. 임종을 맞아 가족과 제자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을 정도로 매화를 아꼈다. 매화의 그윽한 향기에 취해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매화를 읊은 '매화시'만 107수에 달하고 그 가운데 91수를 뽑아 <매화시첩>을 편찬한 바 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라는 시다.

 뜰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 따라 오는 데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꽃 그림 자 몸에 가득해라.

이황은 사후에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담청정한 삶과 넓고 깊은 학문, 메일 데 없이 분방한 풍류정신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70살이 되던 1570년 12월 8일 매화가 첫 꽃망울을 틔우던 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간병 온 제자들에게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과,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는 자신이 미리 써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의 열 글자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및 뜻함과 행적을 간략히 쓰도록 당부하였다. 

그가 생전에 써 두었던 자신의 <묘갈명> 한글 번역문이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중년에 어찌 학문을 좋아했고  
 말년에 어찌 벼슬에 올랐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세상에 나가서는 넘어졌으나  
 물러나 은둔하니 올발랐네.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인 말씀이 참으로 두텁구나.  
 나는 옛 사람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후세 사람들이라고 어찌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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