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아라이’가 가르쳐준 ‘하모니’ [내 인생의 오브제]

2024. 2. 2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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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태욱의 요술 기타
김태욱 아이패밀리SC 회장이 기타를 치고 있다.
부모님은 대구에서 조그만 양품점을 하셨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홀로 밥상보를 열고 어머니가 차려놓으신 밥을 먹었다. 여느 때처럼 흑백 TV를 돌리다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손이 멈췄다. 화면 속에서 비틀즈가 겟 백(get back)을 부르고 있었다. 1979년 열한 살의 김태욱이 음악에 빠져든 순간이었다.

마치 존 레논이 된 듯, 엄마의 가발과 옆집 할아버지의 동그란 안경을 몰래 쓰고 빗자루를 기타 삼아 혼자 거울을 보고 공연을 하는 게 최고의 낙이었다.

전설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아라이 키요타카(박청귀)는 1992년 스물셋의 김태욱이 현실에서 만난 비틀즈였다. 서울로 상경해 가수가 됐지만 ‘내가 원하는 음악’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그는 박청귀의 연주를 듣고 전율을 느꼈다. 무작정 자신이 만든 노래가 담긴 데모 테이프를 들고 과천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찾았다. 박청귀는 1984년 도쿄에서 조용필의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한국에서 활동을 해왔다.

데모 음악을 들은 박청귀는 그 자리에서 기타를 들고 즉석으로 노래를 편곡해냈다. 1990년 생산된 타카미네 PT206이었다. “마치 요술 기타 같았죠. 형에게 수차례 졸라 1993년 기타를 선물 받았습니다.” 둘은 이 기타로 만든 곡으로 함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

1998년 포컬 디스토니아라는 희귀병으로 성대신경에 이상이 생기면서 김태욱은 인생의 지하 터널 속으로 빠졌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아라이와의 만남도 피했다. 하지만 그가 준 기타는 놓을 수 없었다. 여전히 무대에 서는 상상을 했다.

그는 2000년 웨딩 서비스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첫 6년간 월급을 한 번도 받지 못할 만큼 어려웠다. 사채업자에게 손을 빌려야 할 때도 있었다. 녹초가 돼 집에 오면 다시 기타를 찾았다. 그새 목소리는 필담을 해야 할 정도로 악화됐다. 2002년 기타리스트 아라이는 뇌출혈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김 회장은 “목소리를 찾고 나면 형을 찾아가려 했지만 결국 부고를 먼저 들었다”고 회상했다.

아라이 형의 기타와 음악 인생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하모니’였다. 그는 늘 밴드와 함께 무대에 섰다.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는 세션맨으로 구성된 밴드보다는 하모니를 중시하며 서로 빈자리를 채워주는 사람들과의 무대가 늘 완성도가 높았다.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전문성도, 경험도 없었지만 같은 목표를 갖고 서로 격려하고 배려하며 커왔다.

그의 회사는 지난해 1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기록했다. 골방에서 그를 위로했던 타카미네 PT206은 현재 송파에 위치한 아이패밀리SC 사옥 지하 밴드실에 놓여 있다.

직원들이 자유롭게 쓰도록 개방한 곳이자, 창업 후 24년간 회사를 함께 이끌어온 ‘5인조 밴드’인 김태욱 회장과 김성현 사장, 윤현철 부사장, 김춘수 소장, 박현준 상무의 여정을 기리는 공간이다.

“골방에 누워 목소리 없이 내가 튕기는 기타 소리만으로도 음악이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회사에서도 내 목소리만 내기보다는 멤버들이 내는 소리를 모아 하모니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때 골방을 박차고 나갈 힘이 생겼어요. 이 친구(타카미네 PT206)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골방에 있었을 겁니다.”

(이새봄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7호 (2024.02.21~2024.02.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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