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부정선거가 이기붕 당선이 목표?... <건국전쟁> 그건 아닙니다
[김화빈 기자]
▲ 14일 오후 2시 30분 상영 중인 영화 <건국전쟁>. |
ⓒ 김화빈 |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은 몇가지 사료와 인터뷰를 통해 '독재자 이승만'이란 평가를 오해라고 항변하지만, 이는 역사적 맥락을 배제하거나 근거를 취사선택한 결과물이었다. <오마이뉴스>는 <건국전쟁>에서 아래 네 가지 내용을 검증 대상으로 삼았다.
① 3.15 부정선거는 당시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승만과 무관하다.
② 이승만 정부가 시행한 1950년대 민주주의 교육이 4.19 혁명의 정신적 원동력이 됐다.
③ 이승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어졌다.
④ 좌익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5.10 선거(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막기 위해 제주 4.3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한국의 좌파세력들은 4.3의 동기를 은폐했다.
<건국전쟁>은 19일 기준 누적관객 71만 명을 넘어섰다. 영화를 본 윤석열 대통령은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추켜세웠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등 여당 정치인들의 관람이 이어졌다. 언론도 연일 '흥행'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심용환 역사N연구소장은 "<건국전쟁>은 한국의 민주화 성과를 전면 부정할 뿐만 아니라 맥락을 배제한 비틀기로 이승만을 '국부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영화"며 "박근혜 정부 국정교과서 사태 후 변형된 역사왜곡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 1960년 3월 17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
ⓒ wiki commons |
<건국전쟁>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가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승만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선거 직전 조병옥(민주당 대통령 후보)이 사망해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확실했지만, 부통령 선거에선 장면(민주당 부통령 후보)이 이기붕에 비해 지지세가 우세했던 점을 근거로 들었다.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에서 발생한 선거부정행위를 통틀어 가리킨다. 민주화운동사전에 따르면, 이승만은 선거 1년 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던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심용환 역사N연구소장은 "당시 헌법은 대통령 사망 시 부통령이 승계하도록 규정해 이승만 급사로 정권이 넘어갈까 우려했던 이기붕은 야당 지도자들과 연대해 내각제 개헌안까지 주장했다"며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 권력 유지를 위해) 내각제 개헌논의를 철저히 막았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경찰과 정치깡패를 동원, 사전투표 및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이어 "여기엔 학생, 청년, 주부 등 모든 국민들에게 가입이 의무처럼 여겨진 국민회·대한청년단·대한부녀회·학도호국단 등 관변단체도 적극 동원됐다"고 "4.19 혁명은 부정선거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기에 누적된 사회문제에 대한 저항"이라고 강조했다.
▲ 1960년 4.19혁명 당시 초등학생(당시 국민학교)들이 시위에 나선 모습. |
ⓒ 국사편찬위원회 |
1949년 이승만이 제창한 일민주의는 '하나의 국민'이라는 통합을 강조했지만 점차 이승만을 유일한 민족 지도자로 우상화하는데 동원됐다. 홍태영 국방대 안전보장대학원 교수는 2016년 '과잉된 민족과 찾을 수 없는 개인 : 일민주의와 한국 민족주의 특수성'이란 논문에서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국시'라고 명시했으나 국민과 정치권 내부에서 합의되지 않은 자기의 주장이었다"면서도 "이후 일민주의는 다양한 전국 조직과 자유당, 경찰, 이승만 우상화를 통해 구체적 내용과 틀을 갖추며 한국적 파시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져 갔다"고 분석했다.
김두진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는 2023년 <한국의 민주시민교육과 공민개념의 형성>이란 논문에서 "1946년 미군정의 '사회생활과' 도입을 계기로 미군정(청) 학무국 참여 학자들에 의해 서구 시민개념이 수용된 것으로 파악됐으나 생각만큼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다"며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의 일민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한국적 민족주의 담론을 차지해 서구의 공민가치와 갈등을 일으키게 됐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보다 반공주의를 강조하는 교육 기조는 더욱 강화된다. 조건 동국대 대외교류원 연구교수도 2016년 <제1차 교육과정 성립기 문교부 조직과 반공 교육정책>이라는 논문에서 "1955년 8월 공포된 제1차 교육과정은 해방 이후 정부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이후의 교육과정의 전형이 됐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더욱 철저해진 반공주의 이념을 삽입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문교부(교육부 전신) 조직은 처음 마련된 뒤 두 차례 개편됐는데 특히 1955년 2월 문화국 업무 확장과 사회교육과를 중심으로 한 부서 개편이 특징적"이라며 "이 개편으로 문화국에 '검열 사무'가 이관됐고, 사회교육과 내 '국민사상 연구지도'와 같은 업무가 부가됐다. 이는 반공교육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정비해 사회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했던 의도"라고 설명했다.
심용환 소장은 "미군정기 때 교육계 뜻있는 학자들이 미군정에 강력히 요청하면서 의무교육의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며 "이승만 정부는 이 시스템을 승인했지만, 오히려 1950년대 일민주의가 강조되면서 권위주의적 반공교육으로 나아갔다. 학교 운동장에는 이승만 생일잔치가 열렸고, 교무실에 이승만 사진이 걸렸던 시대"라고 말했다.
▲ 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
ⓒ 자료사진 |
<건국전쟁> 후반부에는 이승만 정권의 3개년 경제계획이 박정희 정권의 5개년 경제계획으로 이어졌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1999년 발간된 <영욕의 한국경제>(김흥기 펴냄)에 따르면, 이승만의 3개년 경제계획은 줄어드는 미국의 원조를 원활히 하기 위해 1959년 12월 채택됐다. 하지만 이는 국무회의에 상정된 지 1년이 넘어서야 확정된 것이었고, 이승만 정부의 실행 의지도 부족했다. 또 이듬해 4월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계획과 박정희의 계획은 질적으로도 차이가 크다. 이승만의 계획은 ▲ 쌀 수출을 통한 농촌 소득 증대 ▲ 2차 산업 비중 확대를 통한 산업구조 근대화 ▲ 비료, 시멘트, 펄프, 기계산업 등 수입대체산업 육성 등이었다. 즉, 한정된 재화로 1·2차 산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것인데, 이는 광부·간호사 독일 파견, 한일협정 등으로 자금을 확보한 뒤 단계적으로 산업군을 확장한 박정희의 방식과 다르다.
심용환 소장은 "이승만의 계획은 1차 산업인 쌀 수출을 통한 농가 소득 증대와 2차 산업을 동시에 확대한다는 것인데, 이는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실패한 원인인 농공병진정책(농업 진흥과 공업화 동시에 진행)과 같은 것"이라며 "반면 박정희는 군사독재로 많은 비판을 받지만, 경제에선 철저한 단계론자였다"고 말했다.
이어 "박정희는 농촌을 소외시키는 대신, 도시를 중심으로 1960년대 식품, 가발, 전자제품 조립 등 경공업을 일으킨 다음, 경공업에서 획득한 자원 등으로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며 "박정희는 기존 이승만의 민족주의 경제를 버리고 미국 수출 중심으로 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 2003년 10월,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
ⓒ 제주4.3 아카이브 |
<건국전쟁>은 대표적 국가폭력인 제주 4.3 사건의 책임을 "좌파"로 돌리면서 그것이 의도적으로 은폐됐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매춘 발언'으로 유명한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는 영화에 출연해 "4.3 사건은 1948년 5월 10일(제헌 국회의원 선거)을 막으려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기획이었는데 좌파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 희생자들의 피해만 강조한다"고 발언한다.
2003년 정부가 발간한 <제주4.3 진상조사 보고서>는 4.3 사건의 배경과 진행을 이렇게 설명한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른바 3.1절 발포사건 희생자 대부분은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제주도 전체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민관합동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해 (총파업의 원인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 반감,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 발포보다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군정당국은 응원경찰과 서청, 청년단체원을 제주에 대거 내려보내 물리력으로 검거 공세를 전개했고, 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의 전면대립 국면으로 돌입했다."
심용환 소장은 "정부 보고서에도 4.3 사건 이전 제주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도민과 경찰의 갈등이 있었고, 좌익이 이를 이용한 점이 나온다"며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이 강경대응을 선택하며 연말부터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좌익의 봉기가 일부 원인이라고 해서 국가의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할 순 없다"고 단언했다.
<제주4.3 진상조사 보고서>는 인명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산하며 "무수히 많은 주민들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됐고, 더욱이 노약자에 대한 무차별 살상은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 실태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본의 아니게 이승만의 죄상을 더욱 드러낸 '건국전쟁' https://omn.kr/27eyz
'런승만'은 왜곡? '조선'도 인정한 한국전쟁 당시의 진실 https://omn.kr/27exu
한동훈이 상찬한 이승만의 농지개혁, 그 실상 살펴보니 https://omn.kr/27fkc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예상 밖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개봉 열흘째인 전날까지 누적 관객 수는 18만여명에 달한다. 사진은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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