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필의 視線] ‘건국전쟁’ 부풀리려 덮으려 않았으면

조한필 2024. 2. 2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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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대통령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보지 않았다.

'건국전쟁'은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1875~1965)의 이야기라 봤다.

누가 책과 논문을 찾아보며 영화 내용을 따져 보겠는가.

영화는 한국전쟁 관련,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피난은 당연하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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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대통령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보지 않았다. 누가 왜 그런 영화를 만들겠냐. 미화가 없을 수 없다. ‘건국전쟁’은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1875~1965)의 이야기라 봤다.

역시 만든 이의 제작 의도가 곳곳에 배어있고, 그 의도를 살리는 사실 위주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진보·보수의 골을 더 갈라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편치 않았다.

영화는 책과 달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빠져들게 한다. 전문 학자가 아닌 이상 관객은 영화가 이끄는 데로 따라가기 십상이다. 누가 책과 논문을 찾아보며 영화 내용을 따져 보겠는가. 영화는 무서운 프로파간다이다.

우리는 아직껏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대통령을 갖지 못했다. 털끝만한 흠결도 없는 대통령을 원하는 것일까. 역사적 인물이라고 모든 점이 존경과 칭송을 받을 수 없다. 과(過)를 들춰내기 앞서 공(功)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승만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물이다. 20대 초반부터 서울 장안의 주목을 받았다. 1897년 배재학당 졸업생 대표로 ‘한국의 독립’ 주제 연설을 영어로 해 서울 외교가를 놀라게 했다. 이후 만민공동회 선동적 웅변가로, 신문에 논설을 쓰는 행동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영화는 그의 공 일부를 키우고, 과는 일부 덮으려 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승만은 과보다 공이 더 많은 역사적 인물이다.

1918년 말~1919년 초 재미한인사회는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이승만, 정한경 등을 파견하려 했다. 이 사실이 도쿄와 국내에 알려져 도쿄 2.8선언 및 3.1독립선언을 이끄는 힘이 됐다. 이를 두고 영화는 이승만이 3.1운동 촉발에 영향을 줬다고 했다. 그러나 강화회의 대표 파견은 안창호가 주동이 돼 추진한 것이다. 이승만은 실현가능성이 적다고 여기면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는 당시 학력·인맥 면에서 탁월한 한인이었다. 가장 내세울만한 인물이었다. 임시정부를 상하이·서울·노령 등지서 조직할 때 모두 정부 수반으로 그를 추대했다.

이승만은 1910년 미 명문 프린스턴대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린스턴대 총장으로 그와 친분이 있는 윌슨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윌슨 대통령 딸이 결혼할 때 초청을 받아 한인사회를 놀라게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길에 도쿄에서 맥아더의 환대를 받았다. 식민지 출신 정치인이 점령사령관으로부터 받기 어려운 대접이다. 사진은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의 도쿄방문 모습.   네이버 캡처

영화는 그의 외교독립론을 높이 사면서 무장투쟁노선을 깎아내리고 있다. “수백만 일본군을 수천명 독립군이 어떻게 상대할 수 있냐”는 식이다. 그러나 이승만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국내 침투를 위한 한인 게릴라부대 창설을 미국과 구체적으로 협의했다.

영화는 한국전쟁 관련,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피난은 당연하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사수’ 방송이 나가는 시점에 시민들은 대통령이 피난 간 걸 알지 못했다. 납북된 국민이 많은 이유일 수 있다.

3.15 부정선거와 관련해선 대통령 때문이 아니라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벌인 일임을 강조했다. 조병옥 후보 사망으로 이승만의 당선은 따논당상이라고, 대통령이 부정선거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무리한 집권 연장이 항상 문제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54년 사사오입개헌은 박정희 대통령이 따라하는 바람에 더 큰 오점이 됐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미 점령군도 함부로 못 대하는 한국인이었다. 맥아더는 국내의 하지 사령관까지 도쿄로 불러 귀국길의 이승만을 맞았다. 그는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해 미국을 놀라게 했고, 또 미국으로 하여금 우리와 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만들었다. 1940, 50년대 우리에게 당당한 독립운동가이자 글로벌 스펙의 정치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프린스턴대 대학원 시절의 이승만(윗줄 왼쪽). 그는 미국 유학 5년 반만에 아이비리그 명문대의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네이버 캡처

 ※참고서적: 『초대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이정식,2002년)
                 『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2005년)

/천안·아산 선임기자  chohp1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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