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있는데도 나가래"...빅5 의료공백, 환자들 울분 토했다 [르포]
“어제도 양치하다 쓰러질 뻔한 거 내가 붙잡았어. 병실 자리가 있는데도 나가래. 병원 옮기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20일 오전 서울대병원, 60대 여성 A씨가 짐을 들고나오며 울분을 토했다. A씨의 남편은 지난 11일 밤 심부전 증상이 나빠져 급히 응급실로 실려 왔다가 입원 중이었는데, 전날 의사가 조기 퇴원을 권했기 때문이다. 지난주만 해도 의사가 “최소 일주일은 더 입원하고 치료해야 한다”고 했지만, 전공의 파업 예고에 말을 바꾼 것이다. 환자를 돌봐줄 의사가 없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남편의 상태가 걱정된 A씨는 계속해 퇴원을 거절했지만, 병원은 급기야 “오늘 오전 6시 이후로 안 나가면 환자만 방치되고 응급 상황이 발생해도 책임을 못 진다”며 퇴원을 종용했다고 한다.
A씨는 결국 남편을 다른 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A씨는 “병원을 옮기면 CT를 다시 찍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주삿바늘도 다시 꽂아야 한다. 안 들 비용도 더 드는 것”이라며 “의사 말을 들어야 하면서도 서운하다. 환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새삼 깨닫는다”고 말했다.
20일 이른바 ‘빅5’ 병원 전공의 2745명 중 1000여명이 사직서를 제출하며 대형병원 내 의료 공백이 현실화됐다. 보건복지부는 19일 오후 11시 기준 주요 100개 수련병원 소속 전공의의 55% 수준인 6415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이날 오전 밝혔다. 이날 서울대·신촌세브란스 등 ‘빅5’ 병원은 조기 퇴원자가 속출하고 파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줄어 평소보다 썰렁한 모습이었다. 외래 진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방문한 김모(76)씨는 “병원에서 예약 확정 문자를 보내줘서 왔는데 안 그랬으면 파업 때문에 안 왔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의 저체온증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60대 하모씨는 “예전엔 여기가 북적북적했는데 오늘은 썰렁한 것 같다”며 “구급차도 파업 때문에 조그만 병원으로 가자고 권하더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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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외래도 “진료 불가”…공백 현실화
대형병원 응급실 공백도 현실화됐다. 19일 오전 11시 신촌세브란스병원이 응급실 접수를 중단했던 데 이어 20일은 서울아산병원에서 ‘응급실 병상 포화 상태로 진료 불가’라고 쓰인 입간판이 등장했다. 전날 오후까진 없었던 것이었다. 병원 관계자는 “입간판을 새로 세워둔 게 전공의 파업 여파 때문은 아니다”라며 “응급실 옆 감염 관리 센터로 환자를 받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응급실을 찾은 시민들은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30대 한모씨는 “원래 심장쪽 지병이 있어 응급실에 자주 왔는데 오늘은 입간판이 세워져있어 다른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일부 과는 외래 진료도 거부했다. 세브란스 안과는 이날 오전 환자들에게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전공의 사직으로 일반 진료 진행이 어렵다. 내원 시에도 진료가 불가해 병원이 정상 운영되면 다시 예약해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실제 안과 접수대 앞에는 ‘특수 처치 혹은 검사가 불가한 경우 진료가 어려울 수 있다’는 안내문이 올려져있었다. 병원 관계자는 “원래 전공의가 안압, 시력 검사 등 예진을 담당했는데, 전공의 파업으로 교수도 기초 데이터를 볼 수 없어서 진료를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애초 전공의는 수술 보조, 응급실 당직 업무 등을 도맡아 일반 진료에는 차질이 없을 거라는 게 병원 측 입장이었지만 교수, 전임의(펠로)가 병동 케어 등 전공의 업무까지 맡게 되며 과부화가 왔다는 게 병원 측 설명이다. 서울성모병원 정형외과도 이날 “과내 사정으로 원활한 진료 어렵다. 급한 진료가 아니면 4월 이후로 예약 변경을 부탁한다”고 안내 문자를 보냈다. 정형외과 대기실에 있던 방모(69)씨는 “예약을 미뤄달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수술 후에 처음으로 잡힌 검진이라 안 올 수가 없었다”며 “평소엔 1시간이면 끝났는데 오늘은 2시간 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병원으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해 불만을 터뜨린 환자들도 많았다. 발목 통증으로 세브란스병원 정형외과를 찾은 정모(42)씨는 “파업 때문에 병원에 전화를 했는데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해서 답답한 마음에 일단 찾아왔다”며 “오늘 안에 진료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불안을 호소했다.
병원 “중환자실, 비상체제 가동”…간호사 불만도
병원은 일단 중환자실을 중심으로 전력을 쏟아붓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는 “중환자실, 수술실, 분만실은 비상체제로 운영 중”이라며 “교수와 펠로 등 남은 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공백 없이 24시간 정상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은 “병동 축소 운영으로 퇴원·전원 권유를 시작했지만 교수들 판단 하에 괜찮은 인원만 퇴원 조치하고 중증환자는 우선 케어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날 서울대병원에서 제왕절개로 쌍둥이를 출산할 예정이었으나, 수술을 하루 앞두고 연기를 통보받았다는 환자의 사연이 전해졌지만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해당 환자는 예정된 날짜에 수술했다”며 “중환자실·응급실은 정상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공의 업무를 떠맡게 된 간호사들의 불만과 걱정도 터져나왔다. 서울아산병원에선 간호사 결원 대체 인력인 ‘에이플러스팀’이 전공의 대신 출근 및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아 논란이 됐다. 빅5 병원 중 한 곳에 근무하는 간호사 B(25)씨는 “전공의 파업이 시작됐는데도 아직 업무 체계에 대한 공지를 받지 못했다”며 “응급 상황은 속도전인데 원래도 업무가 많은 간호사가 전공의 업무까지 맡게 되면 삐걱거릴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PA(진료보조 또는 임상전담) 간호사 투입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간호법 제정도 안 된 상태에서 법적 책임을 떠안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장서윤·김서원·이찬규·이아미·박종서 기자 jang.seo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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