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팔십... 아직도 쓸 이야기가 많습니다

박도 2024. 2. 2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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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칼럼] 13화 : 오래 살아서 미안합니다(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정치적인 동물이다"라고 했다. 최첨단 산업 사회인 오늘날은 강원도 산골에서 사는 한 서생의 일상조차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의 영역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그리하여 산골 서생이 세상사를 한 발짝 떨어져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곧이곧대로 전하고 싶다. 앞으로 써내려갈 글엔 신변잡담에서부터 이웃의 이야기, 더 나아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우국충정까지 담고자 한다. 옛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과 같은 마음가짐과 좌고우면하지 않는 필치로 가능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세대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골라 나눌 계획이다. 독자 여러분의 큰 성원과 질책을 바란다 <기자말>

[박도 기자]

여든을 맞으면서

2024년 새해가 밝았다. 해마다 맞이하는 새해이지만 올해는 다른 해와는 조금 다른 감회다. 헤아려 보니 여든을 맞는 해이기 때문인가 보다. 동갑인 고향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하자 그가 말했다.

"어이 친구, 자네 올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지?"
"그럼, 내 생일은 동짓달이라네."
"그렇다면 자네는 78세라고, 정부에서도 이젠 나이를 만으로 사용토록 한다네."

그 친구는 아직도 여든이 되려면 이태는 더 살아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한평생 우리나라 전래의 나이로 살아온 사람인지라 그 친구의 주장에 얼른 동의되지 않았다.

어쩌다가 여든이 되도록 살았을까? 지금 나이로도 할아버지보다 20년을, 아버지보다 10년을 더 산 셈이다. 중국 당나라 시성 두보의 시 곡강(曲江)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였다.

거기에서 유래가 된, 예로부터 드물다는 '고희(古稀)'를 10년이나 더 지나다니… 옛 날 같으면 고려장을 하고도 10년이 더 지나도록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세상사람, 특히 젊은이들에게 "오래 살아 미안합니다"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어린 시절에는 빨리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극장에도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담배도 맘대로 태울 수 있다는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나이를 셈할 때 세 번을 거친다. 그 첫 번째는 동지로 그날은 한 살 더 먹은 숫자대로 새알을 헤아려 먹는다.

그러다가 얼마 후 양력설을 맞으면 한 살 더 먹는다. 하지만, 양력설은 일본 설이라 하여, 그날이 지나도 한 살 더 먹었다고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음력설인 구정을 지나면 어쩔 수 없이 한 살을 더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지, 양력설, 음력설 모두가 지난 이즈음에는 싫어도 한 살 더 먹지 않을 수 없다.
  
 전방 소총소대장 시절의 내 모습
ⓒ 박도
 
나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사실 나는 교만하고 좀 시건방진 사람이었다. 여든이 되기 전까지 나는 내심으로는 노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또 그렇게 살아왔다. 교단에서 물러난 뒤 온 세계를 누비면서 역사기행을 참 많이 했다. 중국 동삼성 지린성의 청산리 대첩 전적지의 하나인 어랑촌을 갔을 때다.

길 안내자가 어랑촌 전적지인 마을 뒷산은 오르지도 않은 채 산 아래서 손가락 지형 설명으로 마치려 하는 걸, 내가 산 정상에 올라 전적지를 답사하자 그도 마지못해 뒤따르면서 제대로 지형 설명을 했다.

또 한 번을 안중근 의사 마지막 길을 뒤쫓으면서 뤼순 204고지를 답사할 때다. 현지 안내인은 고지에 오르지 않고 산 어귀에서 끝내려는 걸 나 혼자 204고지에 올라 뤼순항의 지형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뤼순 204고지에서 내려다 본 뤼순항
ⓒ 박도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르신 산삼 잡수셨습니까?"
"나, 그런 것 먹은 적 없소."
"그런대도 어찌 그렇게 강건하십니까?"
"나 육군 보병 소대장 출신이오."
"아, 네에."

나는 더 이상 군말은 하지 않았지만 고교시절은 내도록 신문배달로 아침저녁 너덧 시간을 뛰어 다녔고, 군 복무 시절도 전방 고지를 날마다 노루처럼 뛰어다녔다. 그런 탓인지 늘그막에도 지칠 줄 모르게 국내외 역사 현장을 누볐다.

여든 살이 되기 전날인 섣달 그믐날에야 나의 46번째 저서인 <평화와 인권의 대통령, 김대중>이 출간됐다. 이 책은 어찌나 신경을 많이 쓰고 여러 날 노심초사를 했든지 책이 나오자 그 후유증 탓인지 이빨이 아팠다.

윗니가 흔들거렸는데,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의사의 처방대로 인플란트 시술을 받기로 했다. 양쪽 어금니 자리에 심을 박고 치과를 벗어나는데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이 '노인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는 겸손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최근의 후줄그레한 내 모습
ⓒ 박도
 
까마귀나 멧돼지 밥이 되고 싶다

비로소 이제는 내 인생 막장에 다다른 느낌에 숙연했다. 지난날 어느 방송진행자(김한길)의 말대로 '한 평생 연습만 하다가 끝나는 것' 같아 나의 무능이 미워졌다. 몇 해 전, 고향의 한 서점에서 북 콘서트를 가졌는데 마무리 시간 <작가와 대화 시간>에 한 후배가 질문했다.

"작가님의 희망이랄까,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나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답했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일입니다."

그렇게 서슴없이 답하자 장내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 순간 이건 나의 크나큰 실언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한 번 쏟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내가 뱉은 말에 족쇄로 살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그 말은 혹자에게는 별 볼일 없는 노인의 망령된 소리로 비칠 것이다.
 
 10대 때 내 모습(초등학교 2학년 때)
ⓒ 박도
 
해방둥이인 나의 지난 삶을 뒤돌아보니 참 오래 살았다. 6.25전쟁, 4.19 민주혁명, 5.16 군사혁명, 10월 유신, 10.26사태, 제5공화국, 제6공화국 등 그동안의 전쟁이나 사태, 정변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면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 등 참 많이 쏘다녔다. 그런 탓인지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미처 쏟아놓지 못한 얘기들이 많다.

앞으로는 신발끈을 바짝 조여맨 다음 건강이 허용하는 한, 체내에 응축돼 있는 미처 쏟아놓지 못한 마지막 얘기들을 다 쏟으련다. 그런 다음, 어느 외진 깊은 산골짜기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고 싶다. 그런 뒤 산야에 버려진 채 까마귀나 멧돼지 밥이 되고 싶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지만, 지금 현재 내 심경은 뭇 짐승들에게 내 몸뚱이를 바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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