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3도 주민들의 380년 토지 반환 투쟁
[박진우 기자]
우리나라에서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은 호남 들녘으로 2023년에도 전라도는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35%를 생산했다.
일제강점기 농민들이 수탈을 가장 많이 당한 곳이 호남이다. 일제는 1909년 한반도 침탈 마지막 작전으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실시하여 호남을 짓밟았다. 임진왜란(7년 전쟁) 시 '약무호남 시무국가야'(若無湖南 是無國家也 호남이 존재하는 한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다)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들었던 동학군이 1895년 1월 장흥에서 마지막 전투를 한 후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전라도의 섬으로 피신했다.
신안군은 우리나라 섬의 33%를 차지할 정도로 섬으로 이루어진 지자체다. 일제강점기 수탈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저항한 곳도 남도의 섬이다. 신안의 섬인 암태, 하의, 도초, 지도, 자은, 매화 등 섬별로 소작인회를 결성하여 투쟁한다.
소작인들의 쟁의(爭議)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불납동맹(不納同盟), 농사를 거부하는 불경동맹(不耕同盟), 굶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아사동맹(餓死同盟), 가을철 수확을 거부하는 추수 거부 투쟁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주와 지주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다.
▲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 주민 성금과 군비로 1997년 건립된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 |
ⓒ 박진우 |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 나와 있는 암태도 소작쟁의가 지난해 100주년을 맞았으나 신안군을 제외하고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삼일독립만세투쟁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신계승 사업과 독립유공자 발굴 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윤석열 정부는 조선의 토지와 식량 수탈에 맞서 싸운 암태도 소작쟁의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 신안군 항일농민운동 독립유공자 유족 간담회 신안군이 발굴한 독립유공자 후손 중 2022년 서훈을 받은 신안군 관내 거주하는 항일농민운동 유공자 유족과의 간담회 |
ⓒ 신안군청 |
2021년에는 도초도에 '항일농민운동 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공사 중이며 자은도는 올해에 항일농민투쟁 기념탑을 착공할 예정이다.
미래세대에 독립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섬사람들의 외침> 소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고, 암태도 소작쟁의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의사(義士) 서태석 평전과 임시정부 항일독립투사 장병준 평전, 고 송기숙 작가 소설 <암태도> 재출간을 지원하였다.
암태도 소작 투쟁 100주년인 지난해에는 소작쟁의와 소설 <암태도> 관련한 학술 행사를 열어 역사적 의미를 알렸고, 암태소작항쟁 기념 전시관을 개관하고 시민강좌를 통해 독립 투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외로운 노력을 하고 있다.
▲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 전시관 암태도 소작쟁이 100주년을 맞아 2023년 개관한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 전시관 |
ⓒ 신안군청 |
암태도 건너편에는 또 다른 섬 신의도와 하의도가 있다. 하의도에는 2009년에 개관한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이 있다. 하의3도 농민들의 목숨을 건 토지탈환 투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숭고한 항쟁정신을 계승, 후손들과 공유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하의3도(간척사업으로 신의도로 하나가 된 상태도와 하태도 그리고 하의도)는 조선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홍주원과 결혼할 때 축하 선물로 20결(약 8만 평)에 대해 4대에 걸쳐 무토사패(無土賜牌- 농지권은 농민에게 주고 국가가 받을 토지세는 가문에 줌)한 토지가 홍씨 집안의 토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 농민들이 건립한 영세불망비 하의3도 토지 재판 승소 후 1912년에 하의3도 농민들이 건립한 영세불망비로 가장 큰 비석이 일본인 변호사 고노 토라노스케(木尾虎之助) 불망비 |
ⓒ 신안군청 |
기념관 야외에 당시 농민들이 세운 불망비(不忘碑 : 어떠한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 5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중간에 가장 큰 비석은 일제강점기 재판에서 승소를 이끈 일본인 변호사 고노 토라노스케(木尾虎之助, 불망비에는 '고노 부쓰노스케'라고 표기)를 기리는 비석이다.
일본인이 판결한 재판에서 하의3도 농민들이 승소했음에도 일본인 토지주는 판결을 무시하고 다른 일본인들에게 팔았고, 하의 3도 농민들은 소작쟁의와 항일투쟁으로 대응했다.
해방 후 1946년 7월에 신한공사하의출장소를 불태우며 항쟁하는 등 항쟁이 지속되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국회에서는 1950년 2월에 하의3도 농지에 대한 소유권이 하의3도 농민에게 있다며 무상 환원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1956년 이승만 정부가 무상환원이 아닌 유상환원으로 결정하자 농민들은 토지를 매입키로 했고, 정부는 토지 등기비용을 전액 부담키로 했다. 그러나 이승만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하의3도 농민들을 기만했다.
지난 380년 동안 9번이나 토지주가 바뀌었으나 하의3도 농민들은 세대를 넘으며 투쟁한 결과 1994년에 농지개혁사업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등기이전을 추진하여 2005년까지 토지를 반환받았고, 2009년도에는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나 아직도 51필지가 도쿠다야시치(德田彌七) 명의로 되어 자산관리공사가 관리하고 있다.
▲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박우량 군수가 하의북초등학교 자리에 2009년 건립한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 실내는 역사의 땅, 항쟁의 땅, 평화의 땅으로 구성, 광장에는 추모기념탐과 조형물, 영세불망비 등이 있다. |
ⓒ 신안군청 |
(사)하의3도농지탈환운동기념사업회 김수현 회장은 "360년 동안 치열하게 싸운 농민 투쟁사는 시대를 앞서간 역사로, 한을 넘어 화합의 역사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행정안전부와 교육부, 국가보훈부 등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소작쟁의와 하의3도 토지탈환 투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기념행사를 이끌고 있는 박우량 신안군수는 "신안 섬의 소작쟁의와 토지 반환 투쟁은 섬 농민들의 숭고한 항쟁정신이자 식민수탈에 항거한 독립투쟁 정신으로 시대를 밝히는 위대한 등대였다. 신안군은 위대한 농민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갈 것이며 치열하게 싸운 농민투쟁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여 독립유공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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