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한 일란성 쌍둥이. 이들은 자라온 환경에 따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갈까? 수십 년 동안 쌍둥이를 연구해 온 학자들은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본성과 양육 방식을 공부해 왔다. 여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쌍둥이라는 신비롭고 복잡한 경로 그리고 패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결국 ‘타고난’길을 함께한 이들이 있다. 바로 쌍둥이 자매 로라와 마리다.
「 로라 이야기 」
프랑스 동부 쥐라에서 자란 로라 헙스트는 1988년 한국에서 입양됐다. 로라가 사는 곳은 포도밭, 울창한 언덕, 몽벨리아르드 젖소, 치즈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마을. 로라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쌍둥이로 태어나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로라의 다섯 살 많은 언니도 한국에서 입양되어 이곳에서 만났다. 로라의 양부모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지 않았고, 이들 가족에게 입양은 숨길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로라는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다. 자매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로라가 자란 곳에는 세련된 부티크는커녕 흔한 H&M도 찾을 수 없었다. 로라에겐 지역 내 값싼 의류 매장에서 하는 지루한 쇼핑이 전부였지만 마음속에는 늘 패션이 자리했다. 일요 신문이 매주 집에 배달될 때마다 로라는 얇은 패션 부록을 보며 그들이 착용한 옷을 관찰하기를 즐겼고, 프랑스 패션 매거진 〈잘루스〉를 구입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런 로라를 위해 중고 재봉틀을 사줬다. 로라는 이를 이용해 청바지와 핸드백을 만들기도 했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패션에 관심이 크지 않았지만 로라의 양어머니는 디자인에 대한 로라의 열정을 적극 지지해 줬다. 로라는 프랑스 쥐라에 있는 일반 캠퍼스에 다니다 결국 양어머니를 설득해 프랑스 디자인 학교 중 하나인 에콜 드 콩데(E´cole de Conde´)에 입학했다. 그녀는 “드디어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오게 된 게 믿기지 않았다”라며 당시 기억을 소환했다. 검정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고, 렌즈가 없는 안경을 썼다. 룸메이트의 〈엘르〉 프랑스를 읽기도 했다.
「 마리 이야기 」
한편 로라의 쌍둥이 마리 리(Mari Lee)는 생모인 에이미 리(Amy Lee)의 손에 자랐다. 마리는 로라와는 다르게 친부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자신이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 의상 디자인과 패션 도매업에 종사하는 엄마 에이미 리 덕에 의류 매장의 화려한 쇼윈도 디스플레이와 엄마가 디자인한 꽃무늬 프린트, 핸드메이드 원단에 천연 염료로 프린트한 한국 문양을 기억한다. 마리의 기억 속에 엄마 에이미는 〈보그〉 미국의 과월호를 수집했고, 집은 20~50년대 빈티지 패션 잡지로 가득 찼다. 마리도 이 잡지를 좋아했다. 1995년, 마리가 일곱 살 때 엄마 에이미는 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이민을 결정했다. 엄마 에이미가 하이패션계에서 일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미국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차차 적응했고, 꾸준히 친구들을 사귀었다. 때때로 마리의 친구 중엔 일란성 쌍둥이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들과 어울리며 쌍둥이의 관계성에 감탄하는 동시에 소외감도 느꼈다. “쌍둥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한 마리는 “한 번도 ‘저 밖 어딘가 내 쌍둥이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면서도 다른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쌍둥이가 있으면 어떨까 상상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정상이라 믿었다. 그러면서 그는 2000년대를 휩쓸었던 메리 케이트 올슨과 애슐리 올슨 자매의 블로그에 푹 빠지고, 린지 로한이 출연한 〈페어런트 트랩〉을 즐겨 보면서 일란성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는 엄마에게 쌍둥이가 나오는 영화를 함께 보자고 조르기도 했고, 때로는 쌍둥이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딸의 말을 듣던 엄마는 그럴 때마다 대화 주제를 바꾸곤 했다.
「 만남 」
마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2007년, 엄마는 마리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초음파 검사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임신 3개월 차가 될 때까지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쌍둥이 임신은 엄마 에이미를 죽음까지 내몰았다. 17시간 동안 진통을 겪었고, 한 아기는 역아(逆兒)여서 자궁에서 회전시켜야 했다. 쌍둥이는 1988년 1월 19일, 7분 간격으로 태어났다. 에이미는 1주일 넘게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예전에 소설에서 읽었던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아이들의 이름을 예린(마리)과 채린(로라)으로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에이미의 삶은 더욱 버거웠다.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고, 도움도 받지 못했다. 에이미는 혼자서 두 아기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을 함께 키우기 위해 도움을 요청할 사회복지 서비스도 알지 못했다. 옷가게를 운영하면서 몸이 약한 예린을 돌봐야 했고,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미혼모라는 낙인이 찍힐 위기에 있었다. 그래서 가족 중 한 사람이 입양을 제안했을 때,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1995년 에이미와 예린이 로스앤젤레스로 떠나기 전, 에이미는 입양기관을 통해 채린을 찾고 싶었지만 채린이 비밀 입양됐기에 성인이 된 후 스스로 재회를 원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시간이 흘러 마리가 19세가 되던 해 에이미와 함께 무용가인 이모를 만나기 위해 찾은 서울 둘로스 호텔에서 운명 같은 만남이 이뤄졌다. 채린이 먼저 엄마 에이미와 예린을 찾은 것이다. 당시 채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향했고, 자신 앞에 서 있는 19세 소녀를 보고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금발로 탈색한 로라와 검은 머리의 마리는 똑같이 컨버스 운동화와 검은색 고무 팔찌를 차고 있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 서로 같은 아이템을 하고 있더라. 우리는 그저 서로를 쳐다봤다”고 마리는 말했다. 세 모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들이 재회한 지 어느덧 16년이 지났다. 로라와 마리는 함께 자란 것처럼 친하다. 로라는 제네바 근처 봉-엉-샤블레(Bons-en-Chablais)에 살고 있으며, 마리는 로스앤젤레스 차이나타운에서 살고 있지만 자주 만난다. 두 사람은 패션을 공통점으로 더욱 가까워졌고, 서로의 블로그 링크를 공유했다. 두 자매 모두 대학 졸업 후 패션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로라는 피비 파일로 시절의 셀린느에서 스케치와 3D 모형을 통해 의류를 만드는 디자이너로 일했다. 이후 프랑스 럭셔리 패션 하우스 MM6 메종 마르지엘라에 입사해 컬렉션 디렉터로 일한 그는 그곳에서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올랐다. 마리는 로스앤젤레스에 기반한 여성복 브랜드 CO에 디자인 책임자로 입사해 2022년 말 회사를 떠날 때까지 10년 넘게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리고 그들은 최근 경력과 자매 관계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달성했다. 두 사람이 3년 동안 함께 CO 컬렉션에서 패션 라인을 디자인하며 컨셉트를 정하고, 원단과 색상을 선택하고, 스타일링까지 한 것. 그것은 그들이 함께하는 의미있는 첫 번째 작업이었다. 이들의 일화는 수많은 쌍둥이들이 개인의 관심사와 성격 그리고 습관이 유전자와 환경 모두의 영향을 받는다는 쌍둥이 연구가들의 이론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엄마 에이미는 두 쌍둥이 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열망이 환경을 뛰어넘어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