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건의 시선] 흔들리는 ‘먼곳의 벗’

채병건 2024. 2. 2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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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Chief 에디터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는 널리 알려진 논어의 글귀다. 이 문장을 놓고 엉뚱한 의문을 가져봤다. 왜 벗이 ‘가까이에서(自近)’가 아닌 ‘멀리서’ 올까. 지정학적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제한된 토지와 물, 자원을 나눠야 하는 가까이에선 친구보다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경계를 맞대지 않고 멀리 있을수록 다툴 여지가 줄어든다.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 이런 존재에 해당한다. 한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실재하지 않았던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이 해방과 6·25전쟁을 계기로 한국과 연을 맺으면서 한국은 그동안 없었던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한국은 ‘미국 옵션’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국을 상대할 때 유용한 레버리지도 생겼다. 중국이 한국을 극한으로 몰면 더는 중국을 상대로 잃을 게 없어진 한국 역시 중국이 극히 경계하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 편입을 선택할 수 있다. 종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놓고 일본이 꿈쩍 않을 때는 인권 문제에 예민한 미국을 움직여 일본을 압박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한미 관계가 중요한 이유다.

「 ‘자원방래 친구’, 지정학상 미국
트럼프 ‘자원방래 채권자’ 자처
북핵·주한미군·교역 플랜B 필수

북한을 다루는 전략 역시 그러하다. 북한이 몰래 핵 물질을 계속 추출하고 핵탄두 미사일을 개발하면서도 표면에선 문재인 정부를 상대했던 이유는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공동체 의식 때문이 아니다. 비록 ‘소대가리’라는 욕설로 끝내기는 했지만 문 정부를 중개인으로 삼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하는 데 베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만들어진 ‘미국은 한국과 동맹을 맺어 동아시아 주도권을 유지하고, 한국은 미국을 통해 레버리지를 얻는’ 윈윈 시스템을 도널드 트럼프가 흔들고 있다. 한중, 한일과 달리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서로 충돌할 일이 적었던 한미 관계에 ‘트럼프 세계관’이 재등장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트럼프 세상의 특징은 기존의 적과 친구의 해체다. 트럼프 세계관엔 또 ‘경제안보’라는 개념이 없다.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지원받는 동맹국·우방국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미국의 이익에 손을 들어주고 미국과 자신들의 이익을 공조화하면서 미국이 만든 안보 질서와 미국을 위한 경제 질서를 보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모른다. 트럼프 세상에선 점을 선으로 연결해 거대한 전략적 우위를 찾기보다는 점마다 손익을 따지는 협상술을 중시한다. 그러니 ‘멀리서 찾아온 채권자’가 되려 한다.

그간 한미동맹은 안보와 무역을 넘어 가치동맹까지 추구했다. 가치동맹의 결속력을 가늠하고 싶다면 조명(朝明) 관계를 떠올리면 된다. 성리학을 통치 철학과 사회 규범으로 내재화했던 조선은 명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비슷했으니 조명 관계야말로 한미가 그렸던 가치동맹에 가장 근접했던 전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 세상에선 가치는 무의미하고, 당장의 실리만 존재한다.

아직 미국 대선은 10개월 여 남았고, 미국 정치 역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 결과를 단언할 수 없다. 최근 미국 여론조사기관의 ‘트럼프 우세’라는 잇따른 양자 대결 결과가 정확한지도 좀 의문스럽다. 2016년 대선 힐러리 클린턴 승리, 2020년 대선 조 바이든 압승, 2022년 중간선거 공화당 압승이라던 미국 여론조사 예측은 모두 틀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트럼프 1기’를 겪어본 한국으로선 트럼프 2기 가능성을 염두에 둔 물밑 ‘플랜B’가 필요하다. 플랜B의 핵심 외교안보 이슈는 미국이 ‘북핵 보유 용인(핵동결)’을 카드로 쓰며 ‘북핵엔 보상, 남핵은 제재’로 나서 한미 관계를 풍파로 몰아넣을 때 이를 다시 북핵 포기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설득 전략과, 주한미군 감축을 요구할 때 한국이 쓸 수 있는 트럼프 보상 카드다. 미국에 짓기로 한 배터리·반도체 공장 등 대미 투자와 양자 무역 관계도 플랜B의 핵심 리스트다.

트럼프 1기 집권을 앞두고 미국 내 지한파 의원들이 무수히 했던 말이 “걱정하지 마라. 미국엔 의회가 있다”였다. 실제로 많은 경우 의회와 행정 관료들은 한미 관계를 중히 여기며 파국을 막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장담을 100% 믿을 것도 아니다. 트럼프가 다시 돌아온다면 1기 때보다 더욱 정교해져서 올 것으로 보는 게 현실적이다. 외로웠던 집권 1기와 달리 트럼프 2기 땐 그를 뒷받침할 관료 풀과 조야의 전문가 집단도 더 확장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한미 관계를 다시 궤도에 올렸는데, 숨 돌릴 틈도 없이 미국 국내 정치가 한국에 더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채병건 Chief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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