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의 마켓 나우] 파괴적 혁신 기다리는 ‘특화된 기술’의 시대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처리장치의 기능이 CPU→GPU→NPU 로 점차 특화되면서 발전하는 배경에는,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최소한의 에너지로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있다. 유럽연합(EU)은 데이터센터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의 증가분도 규제한다. 반도체가 사용하는 에너지 총량에 제한이 걸리게 되면서, 응용에 맞게 최적화된 반도체가 필요하게 된 셈이다.
현재 상황은 20년 전 예측됐다. 2004년 65㎚(나노미터·10억분의 1m)기술이 상용화될 때쯤 ‘반도체 소자기술의 한계는 45㎚가 될 것이다’라는 예측이 나왔다. 그 이후 반도체 소자를 작게 만드는 기술의 발전 속도는 현저하게 늦어졌고, EUV 노광기술 등 온갖 신기술이 등장했지만 반도체 소자의 크기는 10㎚ 내외에서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소자 기술은 한계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구글·테슬라 같은 플랫폼 기업은 10년 전부터 특정 기업의 특정 수요를 충족하도록 설계된, ‘특화된 반도체’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차분하게 뒤를 돌아보면 시대 변화를 예측하고 미리 대비했던 기업들이 최근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스템반도체에서 시작된 응용특화형 기술개발 추세는 메모리반도체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요즘 주목받는 광대역메모리(HBM)기술이 그 사례이다. ‘메모리를 여러 개 쌓아서 수율(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메모리칩의 비율)이 낮아지더라도 GPU와 통신이 좀 더 원활한 메모리를 구현함으로써 연산을 효율화할 수 있다면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할 수 있다’는 원리는 대량생산에 의한 단가경쟁이 핵심인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기본원리와 정반대 개념이다. 오히려 특정 기업 제품에 특화된 메모리를 주문생산하는 방식은 시스템반도체산업과 유사하다.
더 크게 보면, 이렇게 특화된 기술들이 나오는 것은 핵심기술 발전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반도체에서 전계효과소자(MOSFET) 기술이 1980년대 중반 주력기술로 등극하기 전에 몰락해가는 양방향접합소자(BJT) 기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온갖 노력이 동원됐지만, 결국 설계·생산 비용의 증가 문제로 왕좌를 넘겼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시도된 대안기술의 개념들이 MOSFET 시대 연장을 위해 재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몰락해가는 기술의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들은 대부분 극한 엔지니어링에 해당하는 고통스러운 방법들이다. 이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 MOSFET을 대체할 수 있는 파괴적 혁신기술은 어디쯤 와있을지, 과연 오기는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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