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간 연극 ‘미궁의 설계자’, 한국 공연보다 강렬해졌다

장지영 2024. 2. 19.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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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의 과오와 딜레마 다뤄
나토리 사무소, 김민정 작가를 비롯해 한국 희곡 잇따라 무대화
일본 나토리 사무소가 한국 작가 김민정의 희곡을 무대화한 연극 ‘509호실-미궁의 설계자’. 나토리 사무소

연극 ‘미궁의 설계자’는 지난해 2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돼 무대에 올랐다. 극단 반에서 김민정 극작, 안경모 연출로 선보인 이 작품은 ‘고문 공장’으로 불리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의 과오와 시대적 딜레마를 다뤘다. 설계에 참여한 건축사무소 실무자 신호의 197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와 고문당하다 죽은 경수의 1986년, 민주인권기념관이 된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은 다큐멘터리 작가 나은의 2020년 이야기가 교차한다. 예술가의 윤리와 책임을 묻는 이 작품은 월간 ‘한국연극’이 선정한 ‘2023 공연 베스트 7’에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미궁의 설계자’가 한국 공연 이후 꼬박 1년 만인 지난 16일 일본 도쿄 시모기타자와의 소극장B1(135석)에서 ‘509호실-미궁의 설계자’라는 타이틀로 막을 올렸다. 25일까지 12회 공연되는 이번 작품은 일본의 중견 연극 제작사 나토리 사무소가 제작했다. 마나베 다카시가 연출을 맡았으며 모리오 마이, 기토 노리코, 니시야마 기요아키, 야마구치 신지 등이 출연했다.

일본 공연은 김수근의 순수한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어린이가 아예 빠지는가 하면 경수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하는 폭력을 한국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눈에 띄었다. 특히 한국 공연에서는 경수가 대공분실에 끌려와 취조받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클로즈업된 영상이 대공분실 벽면에 투사됐지만, 일본 공연에서는 남영동 대공분실 설계에 참여한 신호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독재정권의 국가폭력 앞에 혼란스러워하는 예술가에 좀 더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일본 일본 도쿄 시모기타자와의 소극장B1에서 ‘509호실-미궁의 설계자’ 공연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이날 사회를 본 하마다 모토코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왼쪽부터), 번역 겸 드라마투르그 심지연, 작가 김민정, 연출가 마나베 다카시, 프로듀서 나토리 도시유키. 나토리 사무소

18일 공연이 끝난 뒤엔 김민정 작가, 마나베 다카시 연출가, 나토리 도시유키 프로듀서가 참여한 관객과의 대화가 진지한 분위기 속에 열렸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 대부분이 1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창작진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마나베 다카시 연출가는 “김민정 작가의 희곡을 처음 읽었을 때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터라 80년대 후반까지도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난폭하게 탄압한 것을 알게 돼 놀랐다. 이와 함께 희곡이 과거의 어두운 역사나 현재 사회의 문제를 똑바로 마주하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서 “일본의 경우 정치권의 잘못된 행태에 대해 국민이 못 본 척하며 침묵하는 편이어서 이번 작품의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김민정 작가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희곡 집필과 관련해서 어떻게 소재를 구하는지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컸다. 김민정 작가는 “작품을 쓸 때 과거의 실제 벌어진 사건에서 소재를 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딜레마를 겪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나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밝혔다. 이어 “내가 쓰는 이런 어둡고 비극적인 소재를 나토리 대표가 좋아하는 것 같다”고 웃었다.

‘509호실-미궁의 설계자’를 제작한 나토리 사무소는 연출가 출신으로 지금은 주로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나토리 도시유키가 1996년 설립했다. 연간 3~4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으며 대체로 사회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거의 매년 일본의 여러 연극상을 받을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본 나토리 사무소가 한국 작가 김민정의 희곡을 무대화한 연극 ‘509호실-미궁의 설계자’. 나토리 사무소

특히 나토리 사무소는 2018년부터 한국 희곡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나토리 대표가 한국 희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바로 김민정 작가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영화 ‘해무’(2014)를 보면서부터다. ‘해무’는 2007년 극단 연우무대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초연한 동명 연극이 원작으로 1998년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폐선 위기를 맞은 어부들이 중국으로부터 사람들을 밀입국시키는 일에 뛰어들었다가 벌어지는 사건을 그렸다. 나토리 대표는 “영화 ‘해무’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원작이 희곡이란 것을 알게 돼 김민정 작가를 수소문했다”고 밝혔다.

나토리 대표는 이후 김민정 작가를 직접 만나 신작을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2018년 ‘갈애’다. 그리고 ‘갈애’ 이후 나토리 사무소는 지금까지 꾸준히 한국 희곡을 무대화하고 있다. 2020년 김민정의 ‘짐승의 시간’과 이보람의 ‘소년 B가 사는 집’에 이어 2021년 이보람의 ‘여자는 울지 않는다’, 2022년 박근형의 ‘그렇게 놀라지 마라’가 공연된 바 있다. 그리고 김민정 작가는 올해 하반기 나토리 사무소에서 재일교포를 소재로 한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나토리 대표는 “한국 작품을 무대에 올려온 것은 한일 문화 교류보다는 그저 좋은 희곡을 공연한다는 취지에서였다”라면서도 “한국과 일본이 이웃인 만큼 완성도 높은 상대방의 연극을 자주 선보인다면 서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일본 일본 도쿄 시모기타자와의 소극장B1에서 ‘509호실-미궁의 설계자’ 공연이 끝난 뒤 연출가 마나베 다카시(왼쪽부터), 번역 겸 드라마투르그 심지연, 작가 김민정, 프로듀서 나토리 도시유키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토리 사무소

도쿄=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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