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독고다이’ 실패기
이효리가 모교 졸업식 축사로 펼쳤다는 ‘인생 독고다이론’에 처음엔 공감했다. 마침 로마로 혼자 무계획 여행을 다녀온 참이었다. 하루 세끼 파스타를 먹어도, 미술관에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그림 앞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라파엘로의 걸작은 까먹고 못 봐도 괜찮은 여행. 혼자라 편한 그런 여행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다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 더 조심하세요. 누구에게 기대고 위안받으려 하지 마시고 그냥 인생 독고다이다 하시면서 쭉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사이에…”라며 격의없던 ‘우리끼리주의자’들에게 종종 뒤통수를 맞았던 터, 무릎을 탁 쳤다. 결국 결정적 순간엔 각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법. 언제부턴가 힘든 일이 있어도 친구보단 집, 술자리 대신 일기장을 찾는 게 습관이 됐다. “나보다 나아 보이는 누군가가 멋진 말로 날 이끌어주길, 그래서 내 삶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길 바라는 마음 자체를 버리세요.” 정말 그랬다.
그런데 어쩐지 씁쓸했다. 대단한 뭔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혼자 여행 중엔 불쑥 파스타가 너무 짰다고, 와인이 오래됐는지 쿰쿰했다고 말 건넬 데가 필요했다. 답하지 않으려는 취재원과 선문답으로 기진맥진 하고 나면 툭 “고생했다” 한 마디가 필요했다. 왜 나는 멋지게 독고다이도 못 하는 건지! 자책하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혼자인 걸 좋아하는 건 같이 있고 싶을 때 같이 있어 줄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독고다이 실패기는 어디에나 있다. 2000년대 초중반, 한일 월드컵 직후 특출난 기량의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꿈★은 이루어진다’를 가슴에 품은 채 속속 유럽 리그로 떠났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선수들이 초라한 성적표를 안고 금세 귀국했다. 독한 정신력에 실력까지 갖췄는데도 이상하게 유럽에선 시원하게 발을 못 뻗곤 했다.
2003년 국내 최초로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던 이천수도 2년이 채 안 돼 무득점으로 K리그에 돌아왔다. ‘독고다이’의 상징 같던 그는 이후 예능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선수들이) 나한테 패스를 줘도 되는데 자꾸 다른 선수한테 주더라”고 토로했다. 외로웠다고 했다. 역시 해외 리그를 경험했던 안정환이 이렇게 답했다. “나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일단 동료들과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 축구도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최근 불거진 손흥민·이강인의 불화, 다음날의 요르단전을 떠올려보니 역시 안정환이 맞았다.
정치부 기자로 지켜보니 ‘독고다이형’ 정치인들도 늘 결정적 순간에 실패한다. 화려한 언변, 정곡을 찌르는 어젠다도 주변 사람이 다 떠나가면 결국 패스 미스가 나기 마련이다. 하긴 이효리 옆에도 반려견 순심이가 있었고 이상순이 있지 않나. 기대고, 위안받고, 누군가한테 이끌려 가보는 독고다이 실패기를 응원한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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