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같은 ‘호날두 노쇼’ 없었다…사우디 ‘호우 세리머니’ 직관기
한국시간으로 15일 개막한 유럽여자프로골프 투어(LET) 취재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수도인 리야드와 관련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유튜브는 물론 인터넷과 SNS 등 가능한 모든 검색 엔진을 동원해 사우디를 파헤쳐봤다.
쉽지는 않았다. 그동안 외세에게 굳게 문을 닫았던 사우디는 2019년에서야 관광비자가 처음 생겼다. 이전까지는 외교나 사업 등의 이유가 아니고서는 쉽게 사우디를 방문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고 문이 아주 활짝 열린 것도 아니다. 관광비자를 발급하려면 우리 돈으로 20만원 정도를 내야 한다. 관광비자로는 흔치 않은 보험까지 ‘강제로’ 포함된 금액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이나 유튜브에는 사우디와 관련된 정보가 많지 않았다. 사우디를 다녀온 여행 유튜버나 블로거도 많지 않아 몇몇 영상을 탐독하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공통적으로 나온 답안은 ▲여전히 외국 관광객은 많지 않고 ▲사우디에는 대중교통이 없어 택시나 우버를 타야 하고 ▲대다수 상점은 낮 시간에는 문을 닫았다가 오후 늦게 다시 열어 새벽 1~2시까지 장사를 하고 ▲주류 판매가 엄격히 제한돼 카페와 디저트 문화가 크게 발달돼있다는 정도였다.
이렇게 하염없이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눈을 번뜩이게 하는 영상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사우디에서 뛰고 있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9·알나스르)였다. 깜빡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 그러나 우리에겐 유벤투스 소속이던 2019년 7월 K리그 친선경기에서 벤치만 지켜 ‘날강두(호날두와 강도의 합성어)’로 낙인찍힌 호날두가 사우디에서 뛰고 있었다는 사실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나스르 구단과 사우디 프로페셔널리그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취재 기간 머물고 있는 18일 오후 8시 알나스르의 경기가 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혹시 몰라 다른 루트로 재차 검색해봤고, 이 시간 리야드의 홈구장(알아왈파크)에서 알파테흐와 홈경기를 치른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후 8시면 골프대회 3라운드가 끝나고 충분히 이동할 수 있어 시간도 딱 맞아떨어졌다.
다음 문제는 티켓 예매였다. 호날두가 나오는 경기라 ‘표가 벌써 다 팔렸다면 어떡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곧장 ‘알나스르 티켓’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입장권을 리셀하는 사이트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번 대회 취재를 도와준, 대회 기간에는 홍정민(22)의 캐디로 뛴 현지 교민 김잘한(22) 씨의 티켓까지 모두 2장을 20만원을 주고 구매했다.
경기일이 다가올수록 묘한 설렘과 걱정이 생겼다. 호날두 경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혹여나 호날두가 게임을 뛰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교차했다. 2019년 이른바 노쇼 사태가 떠오른 것은 나만의 걱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리오넬 메시가 홍콩 원정에서 벤치만 지켜 호날두 사건을 새삼 다시 떠올리게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맞이한 토요일. 3라운드 취재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가 짐을 푼 뒤 택시를 타고 알아왈파크로 향했다. 구장 앞에서 잘한 씨와 만나 함께 입장했다.
알아왈파크는 킹사우드대학교 내 위치한 2만5000석 규모의 축구전용구장이다. 2015년 개장해서인지 전반적인 시설은 깨끗했는데 자리에는 번호가 적혀있지 않았다. 예매를 할 때는 분명 좌석 열과 번호까지 자세히 나와 있었지만, 현장 좌석은 비닐로만 덮여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좌석 이곳저곳에서 자리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관중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동행한 아버지들도 많았다. 이따금 여성 관객도 보였다. 잘한 씨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사우디에서 여성은 남성과 스포츠나 영화를 함께 관람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제한이 조금 풀렸을 때에도 좌석 구역이 나눠져 있었다. 지금 광경은 나도 생소하게 느껴진다”고 귀띔했다.
정확히 오후 8시 킥오프가 됐다. 우리의 눈은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호날두에게만 쏠려있었다. 알나스르에는 세네갈 출신의 정상급 윙어 사디오 마네가 함께 뛰고 있었지만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한국 나이로 마흔이지만, 호날두는 그래도 호날두였다. 설렁설렁 뛰다가도 공이 오면 번개처럼 움직였다. 알나스르의 전반적인 공격 패턴도 호날두 위주였다. 특히 양쪽에서 올라오는 크로스는 십중팔구 호날두를 향했다.
분위기가 막 달아오르던 전반 17분. 기대하던 골이 터졌다. 호날두였다. 술탄 알가남이 오르쪽에서 낮게 깔아준 크로스를 오른발로 바로 때려버렸다. 전매특허인 ‘호우 세리머니’ 역시 빼놓지 않았다. 포즈를 취한 곳이 우리가 앉은 관중석과 멀어 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이미 호날두의 골과 호우 세리머니를 ‘직관’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날 하루는 남은 소원이 없었다. 이후에는 여유롭게 경기를 봤다. 현장에선 이따금 아랍어로 응원 구호를 외쳤다. 따라하기는 어려워도 박수로 함께 호흡할 수 있었다. 경기는 알파테흐가 전반 29분 동점골을 넣어 더욱 팽팽해졌고, 후반 27분 알나스르 오타비우가 결승골을 터뜨려 알나스르가 2-1 승리를 가져갔다. 경기 내내 동료들을 다그치며 마지막까지 분위기를 다잡은 호날두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유럽에서만 뛰던 호날두는 지난해 1월 알나스르와 전격 계약을 발표했다. 추정 연봉만 2700억원. 한 달에만 200억원 넘는 돈을 버는 셈인데 최근 사우디의 스포츠계 광폭 행보를 보면 큰 액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잘한 씨는 “몇 년 전부터 사우디 프로페셔널리그가 막대한 돈을 들이면서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왔다. 대신 그만큼 사우디 국적의 선수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어찌 됐든 호날두 경기를 눈앞에서 본다는 것은 엄청난 일 아닌가. 나도 여기에서 살면서 호날두 게임은 처음 본다. 호날두가 올해나 내년 은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골까지 넣는 경기를 봐서 기쁘다”고 웃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인증샷을 수십 장 찍고 나서야 우리는 알아왈파크를 빠져나왔다. 2만명 가까운 관중이 나가려니 구장 앞 도로가 막히고 택시도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의 추억이었다.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고봉준 기자 ko.b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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