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리 발견했을 때의 설렘, 배우 정이서…공통점 2가지 [홍종선의 신스틸러⑦]
‘기생충’ 피자가게 사장, ‘마인’ 신데렐라 하녀, ‘살인자ㅇ난감’ 첫 번째 목격자
한국영화라고 해도 그 첫 관람이 타국인 경우, 특히나 해외영화제일 때 영화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관람하는 시선에 초심의 긴장이 극대화된다. 덕분에 배우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나 선입견을 대단히 덜어내고 그 작품 안에서 배우가 보여주는 표현법, 그 액션과 리액션에 집중해 관람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 연장선에서 엉뚱한 상상도 한다. 한국 배우들, 혹은 어떤 배우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이 영화를 보는 외국인의 눈에는 작품의 주인공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를 제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발화되고, 스크린에는 프랑스어와 영어 자막이 펼쳐지는 가운데 스토리 전개는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시각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미장센이 가득한 상황에서 결코 간단하다고 할 수 없는 메시지의 영화를 보노라니 배우들이 모두 생경하고도 색다르게 다가왔다.
하정우, 김민희, 조진웅, 김해숙 등 한국 대중에게 익숙한 배우들이 마치 계급장 떼고 신인처럼 연기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 결과 진짜 신인 김태리는 핸디캡 없이 주연배우로 보였다. 당연히 김태리가 보여주는 연기의 담대함과 섬세함이 바탕이 됐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하녀 숙희(김태리 분)를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수레를 굴려도 자연스럽게 느껴지겠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어, 진짠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옆쪽 자리에 앉아있던 외국인 남성에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하녀’라는 답이 돌아왔다.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아가씨’지만, 영어 제목이 ‘Handmaiden’(하녀)인 영향도 있을 테지만, 숙희를 연기한 김태리가 호연 못했다면 불가능한 인식이다.
한국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를 비롯해 임상수 감독의 ‘하녀’(2010)까지 하녀라는 제목의 영화들이 있었기에 ‘아가씨’가 더욱 신선했을 것이고. 포스터에서 보듯 아가씨(김민희 분)와 그 재산을 둘러싼 코우즈키(조진웅 분), 백작(하정우 분)의 쟁탈전에 숙희가 복병으로 뛰어든 상황으로 보이는 기둥 줄거리에 비춰도 ‘아가씨’가 적합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백작이 끄나풀로 끌어들이나 숙희는 처음부터 복안을 가지고 철저히 계획을 실행해 나갔고 끝내 진정한 승리(아가씨의 재산만이 아니라 진정 아가씨와 그 재산)를 거머쥐는 인물이다. 영화 내에서 가장 주도적 캐릭터이고,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아는 사람이다.
‘아가씨’에 비하면 찰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을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볼 때도 엉뚱한 상상을 했다. 주연도 조연도 아닌 단역에 가까운 등장인물이 상상을 불렀다. ‘피자가게 사장’이었다.
작은 점포나마 젊은 나이에 자영업자 사장이 되어서일까. 그를 사장으로 만들어 준 것이 부유한 집안 배경인 데서 오는 고압적 태도는 아닌가 보다 싶은, ‘나 먹고살 점포 있어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너네는 뭐니?’ 의중을 표출하듯 부모님 뻘 기택(송강호 분)과 충숙(장혜진 분)을 막 대한다. 아니 장유유서를 의식하며 보니 무시지, 나이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박스 접는 아르바이트 일꾼으로 대하는 것이고 기택네가 깔끔한 일 처리를 하지 못하니 일거리 준 사장으로서 할 말 좀 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른이고, ‘아’ 다르고 ‘어’ 다른데 빡빡하게 말하니 당연하게 혹은 보통으로 보이지 않고 심히 불편한 게 사실이다.
와, 베테랑 배우들을 이렇게 눈 하나 까딱 않고 한심한 인간들 취급한다고? 그 태연한 연기에, 밀리지 않는 에너지에, 또 문득 ‘외국인 관객들이 보면 이 배우를 신인이라고 생각할까, 다른 작품들에선 주연하는 배우가 카메오로 출연한 걸로 생각할까?’ 상상했다.
이 배우를 다시 본 건 드라마 ‘마인’(2021)이었다. 대한민국에 저런 규모와 구조의 집에서 사는 사람도 있나, 높은 벽 너머 세상이라 들여다볼 수 없었을 뿐이겠지 하는 압도감을 자아내는 효원 가의 저택. 그 저택의 대소사를 진두지휘하는 ‘브레인’ 정서현을 배우 김서형이 연기한 가운데, 서현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 ‘하녀’ 김유연이다.
서현의 아들 수혁(차학연 분)이 반해 버린 하녀, 불같은 사랑에 빠질 만큼 전형적이지 않은 태도의 하녀 유연에 골머리를 앓는다. 하지만 이내, 서현의 남다른 해법 속에 또 유연의 타고난 대범함과 영리함을 무기로 신분 급상승의 신데렐라가 된다. 효원 가의 실질적 일인자 서현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성장한다.
하녀 출신의 재벌가 며느리, 그것도 함께 일하던 하녀를 부리게 되는 인물. 이 배우 누구지? 아! ‘마인’의 격변과 난관에도 ‘기생충’에서처럼 다시금 눈 하나 까딱 않고 헤쳐 나간다. 그제야 이름을 찾아봤다. 배우 정이서. 향후 지켜보고 싶은 젊은 배우를 한 명 더 발견한 즐거움을 안겼다.
최근 드라마 ‘살인자ㅇ난감’(2024)을 보다가 재미있는 포인트에 혼자 웃었다. 영화 ‘기생충’을 본 관객들이 과연 세계적 명성의 배우 송강호가 연기한 김기택을 주인공으로 보일까, 온 가족을 박동익 사장(이선균 분)네로 들이다 못해 아버지 기택을 지하실에서 구조해 내는 ‘다 계획이 있는’ 기우(최우식 분)를 주인공으로 볼까, 하는 상상을 불렀던 배우 최우식과 피자가게 사장 역의 정이서가 재회했다. 이번엔 갑을관계 아니고 대등하다.
5년의 세월 동안 두 배우 모두 부쩍 성장해서 최우식은 누가 봐도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 이탕을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연기하며 악역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표현했다. 배우 정이서는 이탕의 첫 번째 살인 목격자이자 두 번째 피해자 신여옥으로 등장하는데, 발화와 표정이 신선해서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려도 인상적으로 눈길을 붙든다. 어? 어! 맞네!
역시나 관객의 눈은 정확해서 그간 여러 신작 출연을 알리고 공개했을 때보다 더욱 뜨겁게 신여옥 캐릭터를, 그를 빚은 배우 정이서를 반겼다. 시청자들을 드라마 앞으로 대거 불러들이곤, 우리는 아직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는데 속절없이 떠나 아쉬움을 키웠고. 그의 전작들을 찾아보는 누리꾼이 많다.
머지않은 미래에 큰일 낼 배우의 등장. 한국과 미국에 오가며 공부해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더니, 일찌감치 그 혼란에 잠식되기는커녕 배우라는 꿈으로 이어내더니, 배우 정이서 참 독특하다.
매우 예쁨과 아주 평범함을 때때마다 꺼낼 수 있는 외모,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리라 기대되는 기운의 파동. 영화 ‘아가씨’에서 배우 김태리를 봤을 때와 같은 설렘이 실로 오랜만에 차오른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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