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분화로 길을 달리하는 전봉준과 남접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원평집회 터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동쪽에 원평천에 접해 있는 옛 장터. 1893년 이곳에서 원평 집회가 열렸다. |
ⓒ 이영천 |
어윤중이 원평에 온다는 전갈을 받은 지도부는 곧바로 군중을 해산시켜 버린다. 비록 어윤중이 진중한 인물이었다고는 하나 그도 분명 중앙 관리였기에, 만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도 보은집회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다.
현대판 보은집회
군사적 위협에 지레 겁먹은 지도부의 어리석은 판단이,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례 중 하나다. 역사적·객관적 상황인식 결여와 대중의 힘을 믿지 못하고 분출하는 민주화 열망을 간과해버린 비겁한 후퇴였다. 그 결과로 비극적이고 쓰라린 광주항쟁을 맞아야만 했다.
1979년 10월, 일본군 출신 대통령이 오른팔이라 믿던 부하 총탄에 죽임을 당한다. 뒤이어 죽은 대통령의 사생아들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다. 강도처럼 쿠데타가 닥쳐왔어도, 시민들은 따스한 햇볕의 '서울의 봄'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고비가 5월의 서울역 시위였다.
1980년 5월 들어 전개된 일련의 흐름은, 쿠데타 세력이 나라를 장악해 나가는 도구로 내세운 '계엄령'을 어서 빨리 해제하자는 거였다. 또한 대통령 최규하에게 요구한 '민주화 일정'의 실질적 이행으로 힘이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15일 저녁, 서울·경인 지역의 총학생회회장단은 가두시위 철수를 결정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군 병력의 이동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시민들의 호응이 부족한 상태에서 군이 투입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유혈사태를 염려한 결과였다. 또한 그들은 대규모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라 생각해 일단 사태를 관망하고자 했다.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서울의 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정해구. 역사비평사. 2011. p47)
역사에 '만약'을 대입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건 없겠지만, 1980년 서울역 시위의 소위 '지도부'라고 하는 자들이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우리 현대사는 어찌 바뀌었을까? 5월 17일 쿠데타가 가능했을까? 지금도 우리 가슴을 짓누르는 비극의 광주를 막아 낼 수 있었을까? 진정 군대가 동원된 유혈사태를 염려한 회군이었을까?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의기, 4·19의 그 뜨거운 열정, 불과 며칠 후 광주에서 불꽃처럼 일어났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1987년 명동성당의 헌신성 있는 싸움… 왜 이런 것들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는 만들어지지 못했을까?
당시 서울역 지도부의 최정점이라 자처한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이후 행태로 미루어보건대,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결정적 증언자로 등장한다. 또한 수구 정당에 몸담아 여러 차례 국회의원도 지내고 그 정당의 요직도 맡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런 인사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원평 집회
▲ 원평 굵은 모악산 자락에 기댄 원평 전경.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공간 중 하나다. |
ⓒ 이영천 |
원평은 금산사 입구의 소도읍으로, 전라도 서남부에서 전주로 들고나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모악산 서쪽 끝자락 산악과 비산비야의 평야 지대가 접하는 가장자리다. 지리상으로 전주, 군산, 고부의 삼각망의 한가운데에서 점이지대다.
19세기 당시 전라도 서남부 지방에서 산출되는 물산이 이곳을 거쳐 전주로 유통되었음으로 제법 큰 시장을 갖고 있었다. 자그마한 야산의 남서쪽에 촌락이 형성되어 전주에서 순창, 칠보, 정읍, 고부, 김제, 태인 등으로 나아갈 때면 반드시 원평을 지나야 했다.
▲ 김덕명 추모비 원평 버스 터미널 남쪽 위령각에 세워져 있는 김덕명 장군 추모비(왼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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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접의 움직임
▲ 원평집회 터 원평천 너머에서 본 원평집회 터. 옆으로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전투 중 하나인 '구미란' 전적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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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 남접 지도부가 보은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여러 차례 앞선 신원 운동에서 교단(북접)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보은에 가봐야 기껏 교조 신원만을 되풀이할 것이고, 민중 생활과 밀접한 탐관오리의 수탈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 옛 원평장터 원평집회가 열린 장터의 현재 모습. 김제 원평 3.1운동도 이곳에서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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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생활상은 목불인견이다. 곡물 가격을 비롯한 면직물, 수공업품, 생활필수품 등의 가격기재는 이미 외국 상인이 틀어쥐고 흔들고 있다. 이들 물가는 턱없이 올라 해결이 난망이다. 나라는 여기에 살인적인 세금에 수탈을 얹어 놓았다. 이런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한양을 점령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달리하는 남접
1만여 명이 모인 원평에서 전봉준은 김봉집(金鳳集)이란 가명으로 실질에서 집회를 주도한다. 척왜양(斥倭洋)과 멸권귀(滅權貴)를 내세워 외세와 여흥민씨 세도 정권에 대한 저항을 앞세웠다. 또한 본격적인 정치투쟁 단계로 대중을 이끌어, 조선을 둘러싼 제반 모순을 해결하는 세력 규합의 시작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보은집회의 어이없는 해산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어떤 싸움에서든지 명분과 이를 이끄는 중심조직의 권위가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 하는 교훈도 같이 얻게 되었다.
그리고 미세한 움직임도 나타난다. 여러 차례 집회가 가져다준 자각과 실천이다. 가장 먼저 각 포가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 독자성을 띠기 시작한다. 또한 자기 세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힘으로 관아와 맞서기 시작한다. 여러 포끼리 연대하여, 어느 포의 힘이 부족하거나 관리의 탄압에 공동으로 맞설 필요가 있을 때 힘을 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교단의 명령이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겠다는 주체적 실천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북접과 길이 갈리는 순간이다. 이렇게 남접 조직이 분화한다. 이런 행태는 앞으로 전개될 농민혁명 조직체계의 기초로 작동한다.
▲ 원평 장터 늙은 나무는 1893년와 1919년 당시의 함성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 이영천 |
892~893년의 교조신원운동과 일련의 집회를 통해 전봉준을 비롯한 남접은 이런 민중의 힘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더 큰 싸움을 용기 있게 준비할 힘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한다. 캄캄한 어둠 속으로 혁명의 빛이 희미하게 비추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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