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미터 넘는 작품에 압도... 70년 삶 담긴 강렬한 필선

이혁발 2024. 2. 1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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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배 개인전 '부유/현실/기록'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장 1에서 3월 3일까지

[이혁발 기자]

"위대한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 준다."(베네데토 크로체)

딴딴하게 구축/구현된 오원배의 회화세계
 
▲ <무제> 480x600cm ,천 위에 혼합재료, 2023 1층 전시장
ⓒ 이혁발
 
예술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회화작품은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세계를 열어 보이는 현시"(하이데거)를 하는 것이다. '현시'란 화폭에 화가가 보는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크로체는 "화가는 다른 사람들이 단지 막연히 느끼고 언뜻 스치기는 하나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화가인 것이다"라고 했다. 화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선명하게 이미지화 시켜준다는 것이다.

화가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직관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화면에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구축/현현(가시화)시키는 것이다.

오원배의 회화는 "아, 이건 오원배 작품이구나"를 금방 알 만큼 일찍이 독창적인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세계인 것이다. 이 독특한 오원배의 회화 세계는 일찍이 1985년 프랑스 예술원 회화 3등상을 받게 하였고, 1997년 44세의 나이에 제9회 이중섭미술상을 받게 했다.
 
▲ 좌측 <무제> 520x540cm 1층 전시장
ⓒ 이혁발
오원배의 형상은 빗금 치듯 일정한 간격의 터치만으로도 근육질의 인체나 입체감 있는 형상들을 만들어낸다. 단일초점의 원근법은 무시되고, 통상적인 양감을 주지 않는데도 오원배의 형상들은 단단하고 힘 있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1980~1990년대의 인체는 마치 조각가 류인의 울뚝불뚝한 인체를 연상시켰다. 오원배의 인체는 1906년경의 피카소의 여체 그림보다 더 단단하고, 이중섭의 은박그림에 나오는 인체보다 더 딴딴하다.

여백을 많이 살리고 세부묘사를 하지 않아 얼핏 덜 그린 듯하지만 완성도는 충만하고 개별 사물이나 인체, 전체적 구조가 단단한 구축미를 보여준다. 각 사물과 전체적 구조가 단단한 구축체인 세잔의 정물화나 풍경화가 연상된다. 절대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구축 말이다. 세잔은 이것은 재현이 아니라 사실주의 실현, 즉 '구현'이라고 불렀다.

미학자 이주영은 세잔의 작품을 설명하는 퐁티의 글을 빌려 "화가의 임무는 이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접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라고 했다. 오원배의 이 투박해 보이는 인체와 형상들은 새로운 한 세계를 열어 보여줌으로써 관람객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기자의 눈에 오원배 회화의 인체는 삶의 거친 바람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진정한 존재(있음)'의 삶을 획득하고자 하는 한 인간을 만나게 한다. 어쩌면 모두가 허황한 꿈 같은 이 세상에서 그림이라는 도구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보는 한 인간 말이다.
 
▲ <무제> 106x76cm ,종이 위에 아크릴릭, 2023 1층 전시장
ⓒ 이혁발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는 금강석 같은 인체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직후, 80년대 후반 오원배의 인체는 공간에 떠서 부유하는 거친 근육의 인체였다. 검은 우주 안에 찬연히 빛나는 고독한 존재를 시각적으로 현현 시킨 것이었다. 이후 거침이 다소 완화된 형상으로 현실의 거리로 내려왔다.

회색빛 벽체, 파이프가 있는 배경 속에서 인체는 스산한 바람처럼 서성이는 듯했다.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려는 태도도 조금 보였지만 여전히 소외와 고독을 물씬하게 풍기며 존재했다. 70이라는 삶이 녹아든 근래 오원배의 인체는 흰색의 여백 속에 검은색 무광의 광택으로 빛나는 금강석 같은 인체가 되었다.

이 인체에는 비릿하면서도 묘한 끌림이 있는 바닷바람이 있고, 뽀쪽뽀쪽하고 까칠한 수술과 가시로 무장한 줄기를 가졌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예쁜 보라색의 엉겅퀴도 있다. 연인의 키스같이 부드럽게 볼을 핥고 가는 5월의 바람도 들어있고, 강인한 척 쩡쩡 소리 내는 겨울 강의 얼음도 들어있다.

70년 동안 보고 듣고, 인식하고, 인지한 생각들과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그만의 힘찬 빗금 선에 켜켜이 쌓여 있다. 터질 듯 에너지를 잔뜩 응집하고 있다.
 
▲ <무제> 106x76cm ,종이 위에 아크릴릭, 2023 1층 전시장
ⓒ 이혁발
부유하는 인체나 지금처럼 단단한 검은 근육의 인체나 '천형과도 같은 고독'한 인간을 노래한다. 겉으로 시끄럽게 떠들거나 발악의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자신 안으로 침잠한다. 그래서 오원배의 인체는 김추자가 불렀던 노래 <무인도>의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라는 가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 고독이란 "이유를 알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존재론적 상처"(고충환)이다. 어찌할 수 없는 천형 같은 고독인 것이다. 오원배는 그 존재론적 상처를 끌어안고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끝없이 가라앉으며 쌓아왔다. 그 원초적 상처를 끌어안고 승화시킨 것이 화강석 같은 인체로 발현된 것이다.

80년대의 배경으로 있던 검은 우주가 인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인체들은 수십 년간 묵언 수행하고 있는 고승의 뒷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 <무제> 520x540cm, 천 위에 혼합재료, 2023 1층 전시장
ⓒ 이혁발
 
도통한 노승과 차 한잔하는 듯한 그림들

좋은 예술작품은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흔들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서정적 파장을 일으켜 감각세포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유와 상상의 기록'이라는 소전시명이 걸린 2층 작품들은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하고 사유의 공간으로 이끈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기하학적 도형들, 형상의 본질을 추상화시킨 반추상 그림, 완전한 추상 그림, 이렇게 두 개, 세 개 또는 네 개 작품이 한 작품처럼 걸려 있는 작품들이 10여 점이 있다.

이 2층의 작품들은 무언가를 그린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무목적이라는 순수예술의 본령을 실행하는 듯했다. 감각적 조형 놀이를 즐기며 잔잔한 호숫가를 유영하듯 유희하고 있었다. 유유자적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어떤 특별한 형상이 연상되지 않는 완전 추상작품은 '무위자연' 같은 그림 그리기가 실행된 듯 했다.
 
▲ <무제> 종이 위에 혼합재료, 2023 2층 전시장
ⓒ 이혁발
 
이제 멀리 첩첩 산등선들과 인간 세상을 지긋이 바라보는 붉은 노을 같은, 관조하는 경지, 달관에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객관화'와 '욕망의 객관화'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들을 보며 작가는 매우 즐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나 관자 모두에게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줬다. 평생 부지런히 꾸준히, 쉬지 않고 작업을 해온, 마치 종교처럼 그림을 대해온 그에게 그림이 주는 은총 같아 보였다. 하여 그림 감상이 도통한 노승과 알 듯 모를 듯한 대화를 나누며 상쾌하게 차 한잔한 것 같았다.
 
▲ <무제> 64.5x47cm ,종이 위에 혼합재료, 2023 2층전시장
ⓒ 이혁발
작품을 보는 어느 순간, 5미터가 넘는 작품 그 안에서 서성이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길 원한다면, 또는 서정적 전율을 느끼기를 원한다면, 또는 70대 대가가 들려주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사유의 시간을 갖기 원한다면 바다가 가까이 있는 인천아트플랫폼 전시장 1을 찾아가시기를 권장한다. 시간이 맞는다면 세세한 작품설명을 해주는 작품 설명원(설명 도우미)을 만날 수도 있다. 3월 3일까지 전시한다.
 
▲ 2층 전시장  2층 전시장 오른쪽에는 1970년대 80년대 드로잉이 있고 작가자료도 전시돼 있다.
ⓒ 이혁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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