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미터 넘는 작품에 압도... 70년 삶 담긴 강렬한 필선
[이혁발 기자]
"위대한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 준다."(베네데토 크로체)
▲ <무제> 480x600cm ,천 위에 혼합재료, 2023 1층 전시장 |
ⓒ 이혁발 |
예술작품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회화작품은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세계를 열어 보이는 현시"(하이데거)를 하는 것이다. '현시'란 화폭에 화가가 보는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크로체는 "화가는 다른 사람들이 단지 막연히 느끼고 언뜻 스치기는 하나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화가인 것이다"라고 했다. 화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선명하게 이미지화 시켜준다는 것이다.
화가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직관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더해 화면에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구축/현현(가시화)시키는 것이다.
▲ 좌측 <무제> 520x540cm 1층 전시장 |
ⓒ 이혁발 |
1980~1990년대의 인체는 마치 조각가 류인의 울뚝불뚝한 인체를 연상시켰다. 오원배의 인체는 1906년경의 피카소의 여체 그림보다 더 단단하고, 이중섭의 은박그림에 나오는 인체보다 더 딴딴하다.
여백을 많이 살리고 세부묘사를 하지 않아 얼핏 덜 그린 듯하지만 완성도는 충만하고 개별 사물이나 인체, 전체적 구조가 단단한 구축미를 보여준다. 각 사물과 전체적 구조가 단단한 구축체인 세잔의 정물화나 풍경화가 연상된다. 절대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구축 말이다. 세잔은 이것은 재현이 아니라 사실주의 실현, 즉 '구현'이라고 불렀다.
미학자 이주영은 세잔의 작품을 설명하는 퐁티의 글을 빌려 "화가의 임무는 이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접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라고 했다. 오원배의 이 투박해 보이는 인체와 형상들은 새로운 한 세계를 열어 보여줌으로써 관람객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 <무제> 106x76cm ,종이 위에 아크릴릭, 2023 1층 전시장 |
ⓒ 이혁발 |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는 금강석 같은 인체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직후, 80년대 후반 오원배의 인체는 공간에 떠서 부유하는 거친 근육의 인체였다. 검은 우주 안에 찬연히 빛나는 고독한 존재를 시각적으로 현현 시킨 것이었다. 이후 거침이 다소 완화된 형상으로 현실의 거리로 내려왔다.
회색빛 벽체, 파이프가 있는 배경 속에서 인체는 스산한 바람처럼 서성이는 듯했다.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려는 태도도 조금 보였지만 여전히 소외와 고독을 물씬하게 풍기며 존재했다. 70이라는 삶이 녹아든 근래 오원배의 인체는 흰색의 여백 속에 검은색 무광의 광택으로 빛나는 금강석 같은 인체가 되었다.
이 인체에는 비릿하면서도 묘한 끌림이 있는 바닷바람이 있고, 뽀쪽뽀쪽하고 까칠한 수술과 가시로 무장한 줄기를 가졌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예쁜 보라색의 엉겅퀴도 있다. 연인의 키스같이 부드럽게 볼을 핥고 가는 5월의 바람도 들어있고, 강인한 척 쩡쩡 소리 내는 겨울 강의 얼음도 들어있다.
▲ <무제> 106x76cm ,종이 위에 아크릴릭, 2023 1층 전시장 |
ⓒ 이혁발 |
그 고독이란 "이유를 알 수도 치유할 수도 없는 존재론적 상처"(고충환)이다. 어찌할 수 없는 천형 같은 고독인 것이다. 오원배는 그 존재론적 상처를 끌어안고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끝없이 가라앉으며 쌓아왔다. 그 원초적 상처를 끌어안고 승화시킨 것이 화강석 같은 인체로 발현된 것이다.
▲ <무제> 520x540cm, 천 위에 혼합재료, 2023 1층 전시장 |
ⓒ 이혁발 |
도통한 노승과 차 한잔하는 듯한 그림들
좋은 예술작품은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흔들고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서정적 파장을 일으켜 감각세포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유와 상상의 기록'이라는 소전시명이 걸린 2층 작품들은 우리들의 감각을 자극하고 사유의 공간으로 이끈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기하학적 도형들, 형상의 본질을 추상화시킨 반추상 그림, 완전한 추상 그림, 이렇게 두 개, 세 개 또는 네 개 작품이 한 작품처럼 걸려 있는 작품들이 10여 점이 있다.
▲ <무제> 종이 위에 혼합재료, 2023 2층 전시장 |
ⓒ 이혁발 |
이제 멀리 첩첩 산등선들과 인간 세상을 지긋이 바라보는 붉은 노을 같은, 관조하는 경지, 달관에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라깡이 말하는 '주체의 객관화'와 '욕망의 객관화'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 <무제> 64.5x47cm ,종이 위에 혼합재료, 2023 2층전시장 |
ⓒ 이혁발 |
▲ 2층 전시장 2층 전시장 오른쪽에는 1970년대 80년대 드로잉이 있고 작가자료도 전시돼 있다. |
ⓒ 이혁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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