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외국인 '딱지'가 붙는 사람들 [수산봉수 제주살이]

이봉수·고지우 2024. 2. 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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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 제주살이] 재일제주인 3세를 통해 엿본 재일 사회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바다 건너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이 기사는 한미리스쿨이 지난해 말 개설한 1기 심화언론인양성과정 학생들이 주제 선정 단계부터 지도를 받아 제출한 현장기사 쓰기 과제를 데스크 본 것이다. 기사를 쓴 고지우는 제주대 언론홍보학과 학생이며 지난해 초 개설한 무료 초집중언론인양성과정을 수료한 뒤 역시 기숙학교인 심화과정에 입소했다. <편집자말>

[이봉수·고지우 기자]

 2022년 1월 3일 제주대 기숙사 옥상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김용희씨 뒤로 제주시와 바다가 펼쳐진다.
ⓒ 김용희씨 제공
밀항한 재일제주인 3세대의 기구한 사연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용희(22)씨가 3대 만에 제주대에 진학한 사연을 소개하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할아버지 이야기부터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 고 김평수씨는 애월읍 하가리 출신인 '재일제주인'이다. 제주4.3의 광풍이 불고 도민들은 살길을 찾아 밀항선에 올라타던 때였다. 겨우 열한 살. 4.3학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먼저 일본으로 떠난 어머니를 만나러 배에 몸을 실었다. 그게 마지막으로 고향을 보는 날인 줄도 모른 채.

'밀항 1세'가 된 아이들

"빨리 오라!" 함께 승선한 한 여성이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작은 그의 몸을 길게 떨어뜨린 치마 속에 감췄다. 밀항밖에는 어머니를 만날 길이 없었다. 제주도와 오사카를 취항하던 군대환이 미군에게 격침당한 뒤였다. 이미 일본 땅에 발을 들인 가족은 전 재산을 바쳐 밀항 중개인을 물색했다. 밀항선을 타면서 삶을 내걸지 않은 이는 없었지만, 머물러 있으면 죽음뿐이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육지의 식민지로 바뀐 제주에서는 삶을 모색할 방도가 없었다. 4.3학살을 피해 밀항한 제주도민은 1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생사를 걸고 도착한 일본. 그런데 진짜 추격전은 하선하면서부터. 붙잡히면 수용소행에 강제 추방이다. <오무라 입국자 수용소 이십년사>에 따르면 1950년부터 20년간 나가사키 오무라 수용소에서 송환된 한국인은 1만6400명이나 된다. 오무라수용소는 제주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나가사키현에 있었다.

'도로쿠'(외국인등록증)를 내놓으라는 불심검문이 두려운 밀항자들은 길에 함부로 나다닐 수도 없었다. 살기 위한 돌파구는 '결혼'이었다. 평수씨는 그렇게 의붓아버지를 맞았다. 해방 후 건너간 '밀항 1세'들은 해방 전 군대환을 타고 일본에 간 '군대환 1세'의 후손과 결혼하거나 일본인과 위장 결혼해 영주 자격을 얻어냈다.
 
 할아버지 김평수씨의 생전 모습(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퇴원한 뒤 병원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 김용희씨 제공
 
평수씨는 학생 때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다. 아내를 만난 뒤 포장마차와 라멘 가게를 차렸고, 불혹이 넘어서는 건강식품 회사를 경영했다. 많은 재일제주인이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면서 자립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 기피한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업종이 우리 동포 몫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에서 밥 먹고 살려면, 야쿠자를 하든지 의사를 하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동포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재일제주인 3세, 제주로 유학 오다

용희씨는 2021년 9월 제주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주에 왔다. 말로만 듣던 제주도였다. 요코하마에서 학교를 다닌 그에게 제주는 늘 역사의 장소였다. 학교에서 배운 4.3학살의 아픔이 서린 땅. 눈으로 만난 제주는 특히 바다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제주는 조용하고 평온해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도쿄는 늘 사람으로 붐비거든요. 수도권 학교에는 아무래도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이 많으니까 일부러 제주에 온 것도 있어요. 현지인과 어울리면서 문화도 배우고 한국어도 빨리 더 잘하고 싶었거든요."

공부 욕심이 앞섰던 걸까? 복수전공까지 신청했더니 수업은 따라가기 벅찼다. 부모님이 지어준 한글 이름 석 자까지 애를 먹였다. 먼저 말하기 전까지 용희씨가 교포 학생인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혼자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학생은 유학생끼리 비교해 성적을 내지만 교포 학생은 한국 학생과 경쟁해야 한다. 유학생은 학생회도 따로 두는 등 소통 창구가 열려있지만, 의지할 데조차 없는 교포 학생들은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교포 학생도 한국 학생들이랑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저는 운 좋게 취미활동이 겹쳐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는데, 일단 한국어가 늘려면 한국 친구가 정말 필요하거든요. 잘 섞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해요."

우여곡절 끝에 올해 3학년이 되는 용희씨. 어쩌다 보니 가족 중 할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제주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 온 게 전부였다. 형과 누나들은 고모가 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뒤를 이어 미국 유학길에 오르려 했지만, 코로나19로 무산됐다. 그때 알게 된 게 '재일본 제주 출신 교포자녀 미래희망장학' 제도. 관서·관동제주도민협회에서 추천서를 써준 학생에게 학교가 장학금을 지원한다.

고향 땅 밟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

"재일동포 1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오지 못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스스로 도피자라 여기는 죄책감 때문이거나 우리나라에서 입국을 차단하는 경우예요."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KBS 신년대담에서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며 "보여주기식 외교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윤 대통령식 '실리외교'는 고향 땅만 밟길 간절히 기다리는 동포들을 외면한다. 통일국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분단 이전의 '조선적'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높은 장벽이다. 조선적 재일동포의 자유로운 모국방문 논의가 이뤄진 건 전임 정권이 마지막이다.

강경희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은 "이전에는 조선적을 가진 동포들에게 길을 터주는 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며 "조선적 재일동포 중에 제주 사람이 많아서 제주도청에서도 고향 방문 기회를 마련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재일 사회의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건 바깥 사회다. 남북관계가 긴장 상황에 놓일수록 조총련과 민단 사이에 선명하게 선이 그어졌다. 현 정권에서는 국가보안법을 명분으로 남북 교류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지난해 통일부는 6.15공동선언실천 일본지역위원회 주최 행사에 초청된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에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강 연구원은 "조총련과 민단은 이념적으로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의 동포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현 정권에서는 허가받지 않고 조총련 관계자를 만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동포를 분리한다"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대담 끝에서 "북한 주민은 우리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국민'을 적대시하는 정부의 대응과 시책이 두 조직을 갈라서게 만든다.

"너희 학교에서 이상한 거 배우지?"
 
 가나가와중고급조선학교 졸업식 전 날의 3학년 1반 학생들. 맨 뒤에서 마스크를 쓰고 손을 든 이가 김용희씨.
ⓒ 김용희씨 제공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가장 핵심적인 재일동포 조직이다. 동포들은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려고 민족학교를 세웠는데, 조총련계 학교가 한국계 학교보다 훨씬 많다. 용희씨가 나온 가나가와중고급조선학교도 조총련계다. 현지에서 조선학교를 대하는 분위기는 점차 차분해졌지만, 지금도 학생들은 표적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부터 몇 번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들은 적 있어요. 스피커를 틀어두고 '북한으로 돌아가라'면서요. 교복을 보고 '너희 학교에서 이상한 거 배우지?'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한번은 학교 주변이 시끄러워서 친구들이랑 '그 사람들 또 온 거 아니냐'고 장난으로 말한 적 있는데 선생님은 이런 일에 절대 익숙해져서도, 잊어서도 안 된다고 했어요."

혐오 세력은 어떻게 건재할 수 있었나? 재일제주인센터 강경희 특별연구원은 "누가 일본 수상이 되느냐에 따라 다르다"며 "우경화로 치달을 때 우익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취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일본과 북한이 심하게 대립할수록 학생들을 괴롭히는 수위도 높아졌다. 뒤늦게 조선학교도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여전히 무상교육 지원대상 학교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했어요. 동시에 자부심을 가지라고도 하셨죠. 나를 차별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도 분명 있다고요."

외국인 취급에 흔들리는 정체성

"그래도 용희씨는 일본인이니까..."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외국인 취급은 일본에서 다 받은 줄 알았다. 한국어가 서툴다고 이제는 일본인이란다. 한국 국적을 가진 명백한 한국인이지만 일일이 해명하기에도 지쳐 정체성이 흔들린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싫다.

용희씨는 "내 정체성이 한국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윗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 세대에 재일동포의 역사를 전해야 할 의무가 그에게 있었다. 그처럼 부모의 국적을 이어가려는 후손도 있지만, 외국인으로 살아가기 힘들어 귀화하려는 추세다.

귀화 현상에 관해 강 연구원은 "일자리가 걸려있는 문제"라며 "사업할 때도 일본 국적이어야 조건이 더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세대부터는 일본 문화가 더 친숙하기 때문에 교류의 장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향 마을 단위로 뭉쳤던 재일동포 친목회도 하나둘 해체하면서 후대에 내려진 책임은 더 막중해졌다.

강 연구원은 "세대가 늘어갈수록 한국말을 하기 어려워지는데 후손들이 한국어를 배울 기회와 부담 없이 체류할 수 있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일제주인 사업가 김창인 회장 등의 쾌척으로 2012년 문을 연 재일제주인센터는 그 가교 역할에 힘쓰고 있다. 영화상영회와 학술대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재일제주인 중고등학생을 초청해 교류캠프를 진행한다. 재일제주인 공덕비 조사 등의 연구 활동도 병행했으나 자체 예산만으로 지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8년 1월 3일 친가 친척들이 모여 찍은 가족사진.
ⓒ 김용희씨 제공
"제가 열일곱 살 때였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모랑 미국에서 살았고, 가끔 명절이나 연말에 일본에 돌아오셔서 친척끼리 모였죠. 할아버지는 사진 찍는 게 취미였는데 항상 디지털카메라를 챙겨 오셨어요. 우리가 모일 때마다 할아버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고향 살리기 동참한 재일제주인, 지금 삶은

1990년대 중반, '재일제주인'이라는 단어가 학위논문에 실렸다. 일본 속 작은 제주를 형성해 언어와 관습을 간직한 사람들. 조천리, 신천리, 고내리 등 각 마을에서 모인 재일제주인들은 친목회를 형성해 자기 마을 소식을 들었다. 공식 소통 창구는 아니었지만, 고향에 필요한 게 뭔지 들을 수 있었다. 전기를 가설하든 도로를 닦든 고향이 어려우면 나서서 기부했다. 이들의 '애향'은 제주 경제·사회 발전의 밑바탕이 됐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1세의 삶을 잘 모른다. 작년 제주도가 공개한 '재일제주인 1세대 생활 실태조사'를 보면 면담자 53명 중 14명이 생활 만족도에 '불만족'을 표시했다. 고향 사랑에 보답하고자 재일제주인 돕기 특별모금 등 경제적 지원에는 불이 붙고 있지만, 일상의 고민을 해소할 지원은 아직도 미비하다.

강 연구원은 "재일제주인 1세들은 땅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땅값이 오르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며 "친척들 사이도 틀어지고 소송까지 하게 되는데 대사관 말고는 이 문제를 의논할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실태조사에서 드러난 주된 요구사항도 '상담 전용창구 개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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