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언론·독립운동·국사연구가 장도빈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 흉상 |
ⓒ 박도 |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은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장봉구의 차남으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아호는 산운(汕耘), 가계는 조선조 후기 이후에는 재야 유림의 양반이었다. 할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묻혀 살았다.
조선 말기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관직에 진출하기 보다는 차라리 재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사대부로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과 한학을 배웠다. 12살이 되던 1900년 평안감사의 추천을 받아 근대식 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전통학문의 토대 위에 신학문을 수용, 개화기의 지식청년이 된 그는 1906년 이 학교를 졸업, 귀향하여 소학교에 근무하면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사이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우리의 자주권을 빼앗고 침략의 마각을 드러냈다. 1907년에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박하여 퇴위시켰다. 이어 친일파 이완용내각과 그 해 7월 24일 '정미7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이른바 '차관정치'를 자행하였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그는 190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진학하는 한편 <황성신문>의 주필 박은식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신보) 논설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가 '신보'에 입사할 무렵 이 신문의 주필 신채호가 와병 중이어서 그가 많은 논설을 쓰게 되었다. 1909년부터는 신채호와 둘이서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썼다.
구한말 대표적 민족지 '신보'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으로 맞섰다. 이는 이 신문의 발행인 영국인 베델이 치외법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도빈은 신문의 특성을 살려 각종 애국적 논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제의 국권침략을 고발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던 애국계몽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애국필봉은 '신보'의 지면 곳곳에 찬연히 남아 있다.
장도빈은 '신보'에 근무하면서 민족주체 사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사(國史)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는 당시 '신보'의 주필이자 역사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신채호와의 인연이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나, 여기에 '신보'에 근무하면서 부딪치게 된 시대상황의 역사의식이었다. 이 무렵 그는 '신보'의 총무로 있던 양기탁의 소개로 신민회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비밀장부를 보관하는 임무를 맡아 활동하면서 당시 '신보'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언론인으로, 민족운동가로서 그의 초창기 활동은 1910년 일제의 병탄으로 막을 내렸다. 일제는 병탄 다음날 '신보'를 강제로 폐간시키고 <매일신보>로 개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써 그는 만류를 무릅쓰고 신문사를 떠났다.
이후 그가 주력한 분야는 국사연구였다. 망국민이 된 일반 대중의 애국심을 함양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는 올바른 국사교육이 첩경이라고 생각하였다. 국사연구에 열중하는 한편 동지들의 권유로 오성학교의 학감에 취임, 후세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쏟았다. 이 학교는 서북학회에서 설립한 협성학교의 후신으로 장차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이 학교 출신 가운데 최팔용·한위건·김도원 등은 나중에 도쿄 '2.8독립선언'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이 학교는 늘 일제의 감시하에 있었는데 개교 2년 만에 결국 총독부에 의해 폐교되고 말았다. 그는 신민회가 세운 정주 오산학교로 옮겨 잠시 교편을 잡았다.
일제는 병탄 이듬해인 1911년 9월 이른바 총독 데라우치의 암살모의사건을 조작, 민족진영과 기독교계 인사들의 대대적 검거에 나섰다. 기소자가 105인이었다고 해서 '105인사건'으로도 불리는데, 검거 대상자 가운데는 신민회 회원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장도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신변의 위험이 가중되자 망명을 결심하고 1912년 1월 변장을 하여 일경의 감시를 피해 북간도 연길현 국자가로 피신하였다. 나이 25살 때의 일이다.
국자가에 머무르면서 한인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다가 얼마 후 노령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신보'에서 동고동락하던 신채호를 만나 숙식을 같이 하면서 진로를 모색하였다. 우선 경험을 살려 신채호와 함께 이종호가 발행하던 <권업신문>에 항일논설을 기고하여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일제의 침략상을 통렬히 고발하였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이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 이갑·이상설 등과 교류하면서 조국광복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사 교재를 편찬하는가 하면, 연해주에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유물, 유적을 답사하여 국사연구의 자료수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13년 미국에 체류 중이던 안창호로부터 도미 초청과 함께 여비까지 받았으나 신경쇠약 증세의 악화로 미국행을 포기하였다. 중국 단동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그 동안 국사연구 성과를 모아 1916년에 최초의 단행본인 <국사(國史)>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역사인식의 특징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 이후 최초로 '남북국시대' 개념을 도입, 통일신라를 남국으로, 발해를 북국으로 기술하였고 삼국 중에서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신채호 영향도 받았지만 자신이 만주와 노령 지역에서 고구려의 유물, 유적을 탐사한 경험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의 책이 발해와 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중심에 세운 것은 이들 국가가 수(隨), 당(唐) 등 대국의 침략을 이겨낸 국난극복의 의지를 조국광복운동에 되살리려한 의도로 해석되었다.
그는 3.1혁명 이후 국내에서 교육·언론·국사연구 등 문화운동에 주력하면서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일제가 '문화통치'라는 미명하에 우리 민족정신의 말살을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단순히 민족문화의 수호 차원이 아니라 민족보존운동이며 나아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는 이즈음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 1926년까지 여러 권의 국사책을 간행하였다. 또한 <서울>, <학생계>·<조선지광> 등의 잡지를 발행하여 민중과 청소년 계몽에 진력하였다. 이후 그동안 고적답사와 국사연구의 성과를 모아 <조선역사요령>(1923)·<조선역사대전(1928)>, <조선사(朝鮮史)>(1932) 등을 출간하였다.
1930년대는 흔히 '민족진영의 변절기'로 일컬어질 만큼 다수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친일로 변신하였다. 1937년 7월 도발한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는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어상용(1937. 3), 신사참배(1939. 7), '황국신민서사' 낭독(1937. 10) 창씨 개명(1939. 11) 등을 조선인에게 강요하였다. 이는 일제가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사전포석으로 추진한 조선민족 말살정책이었는데 여기에 조선 지식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내노라는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제의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절개를 꺾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산간벽지로 피해다니며 국사연구를 하면서 조국광복의 날을 기다렸다.
8.15 해방이 되자 그는 <민중일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였다.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 운동으로 민족의 진로를 밝히고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서려는 의지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정계의 유혹을 뿌리치고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단국대학을 설립, 초대 학장에 취임하고 1949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출강하여 젊은 생도들에게 올바른 민족사 교육과 민족의식 함양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후 서울시사편찬위원(1955년), 고등고시위원(1959년)으로 위촉돼 활동하고 1961년에는 중앙상훈심의위원으로 선임돼 독립유공자 선정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역사학자로서 많은 공적을 남긴 그는 1963년 9월 12일 76살을 일기로 타계하였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쫓겨났던 백년가게, '을지오비베어'가 을지로에 돌아왔다
- 앞을 못 본다는 충격에 짜증을 달고 살다가
-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외국인 '딱지'가 붙는 사람들
- 청나라에 시집간 조선 공주의 기구한 운명
- 맥주에 이 식물을 넣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복지부 최후통첩 "군대 가면 더 잘 돼? 꼼꼼하게 알아봐라"
- '파우치 대담' 무비판, '정보 비공개' 무보도한 언론들
- 기후위기부터 쓰레기소각장까지... 마포구 정치인들은 이렇게 답했다
- 우크라 "러, 북한 탄도미사일 최소 24발 발사... 2발만 정확"
- 러시아 야권 이끌던 '푸틴 정적' 나발니, 감옥서 의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