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사과'의 세가지 유형
설 연휴 기간 장안의 화제는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됐다. 윤석열 대통령-KBS 대담, 그리고 클린스만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다.
관점과 가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화제를 관통하는 공통 배경 키워드는 '사과 없음' '유효슈팅 없음' 아니었을까.
김건희 여사 가방 수수에 대해 이렇다 할 사과 없이 '아쉽다'로 일관한 윤 대통령의 태도에 국민들은 아쉬워했고, 역대급 졸전에도 활짝 웃으며 한마디 사과 없이 미국으로 떠나버린 클린스만의 역대급 멘털에 국민들은 기가 막혀 했다.
우리 국민은 상대방의 사과에 유독 예민하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위보다 사과하지 않음에 더 화를 낸다. 반대로 무작정 차선에 끼어든 차량이 비상등이라도 한번 켜 주면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아임 소리' '스미마셍'을 입에 달고 사는 미국·일본 같은 나라와는 다르다.
그런 현실에서 정치인들의 사과를 분류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일본'형. 해도 한 것 같지 않은 사과다. 마지못해 사과해 놓고 바로 뒤집는다. 그 대표적 인사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그는 지난 8일 항소심에서 자녀 입시 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실형을 받았다. 1심과 같다. 법원은 그 이유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 전 장관은 "이미 15차례 이상 대국민 사과를 했다"고 반박하지만,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과는 '진지한 반성'이라 보기 어렵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었다. 그 와중에 조 전 장관은 지난 13일 검찰 정권을 심판하겠다며 신당을 창당했다. 상식적인 국민은 이런 걸 두고 반성이나 사과라고 하지 않는다. 말로는 죽창가를 외치면서 하는 행태는 사과와 말 뒤집기를 반복하는 일본과 빼닮았다.
둘째는 '자판기'형.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생각되면 체면 가리지 않고 몇 번이고 "아무튼 사과한다"고 한다. 준연동제 비례대표제 유지를 밝히면서 무려 네 번이나 고개 숙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대표적이다. 다만 영혼 없는 사과란 지적을 받는다. 예컨대 "'준 위성정당'을 창당하게 된 점을 사과드린다"고 한 부분. 사과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표는 미래의 행동을 미리 사과했다. 사과할 미래라면 지금 안 하면 된다. 그러니 며칠 안 가 "내가 사과한다고 하니까 진짜 사과한다고 생각했느냐?"란 말이 튀어나올 것 같다.
마지막은 '트럼프'형. 끝까지 버티고 논점을 흐린다. 그는 4년 재임 중 3만573번의 거짓말을 했지만(워싱턴포스트 조사), 공식 사과는 한 건도 없었다. 부적절한 언행이 들통나도 그걸 인정하는 순간 법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경험칙 때문일 게다. 그러다 보니 지지자는 물론이고 반대론자, 언론들도 트럼프에겐 아예 사과라는 걸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됐다. 하지만 당장은 쾌재를 부를지 모르나 결국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생긴다.
아, 드물지만 또 하나의 사과 유형이 있긴 하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잘못했다"고 나선다. 손흥민·이강인·김민재 같은 우리 축구선수들이다. 이런 이들 때문에 그나마 살맛 나는 세상이다.
"승자는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지만, 패자는 '너 때문이야'라고 탓한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지만,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J 하비스의 말이다. 윤 대통령은 승자일까, 패자일까. 눈을 밟고 있는 걸까, 녹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어떤 보수 원로 언론인은 최근 "치밀하고 계획적인 좌파가 과연 사과로 넘어갈 것 같은가. 2막으로 넘어갈 게 뻔하다"고 주장했다. 맞다. 좌파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보통 국민 상당수는 적당히 사과했다면 1막으로 수긍했을 것 같다. 어찌 됐건 이제는 윤 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길 원하기보다, 그저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을 더 원하는 단계까지 왔다고 본다.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클린스만은 결국 사과를 할까?
김현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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