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고구려, 더 실감 나네…광개토대왕비·고분벽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이하 박물관)에서 고구려의 존재가 이렇게 강렬했던 적이 있을까. 지난달 24일 상설전시관 로비인 ‘역사의 길’에 발광다이오드(LED) 미디어타워, 일명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이하 광개토왕비)가 공개되면서 연 400만명(지난해 기준)이 찾는 박물관의 첫 인상이 바뀌고 있다. 고대 삼국 가운데 영토 대부분이 한국(남한) 바깥에 있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고구려(기원전 37년~서기 668년) 유물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분위기다.
중국 지안(集安)성의 실제 광개토왕비(6.39m)를 재현한 높이 7.5m(받침대 포함 8m)의 미디어타워는 영상물 스크린을 겸한다. 4면을 둘러가며 고구려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적힌 총 1775자의 비문을 보여준다. 중요 단락은 부분 확대해 국문과 영문으로 소개한다. 타워를 에워싼 벽에도 비석 원문을 실제 크기로 프린트한 족자(총 4개)를 걸고 하단엔 국문·영문 해설을 곁들였다.
이 디지털 복제본은 중국 현지의 실제 비석보다 원문이 훨씬 또렷하다. 고구려 멸망 후 잊혔던 광개토왕비는 1880년대 이르러서야 이끼 가득한 모습으로 재발견됐다. 당시 독특한 서체를 높이 산 금석문학자들이 이끼 등을 제거하고 무리하게 탁본하는 과정에서 비 표면이 심하게 훼손됐다.
반면 미디어타워와 족자는 원석탁본인 청명본을 바탕으로 하되 빠진 글자도 여러 판본을 대조해 채워 넣었다. 청명본은 1889년 리윈충(李雲從)이 떴던 원석탁본 50벌 가운데 하나다. 비문을 3글자씩 잘라 한페이지에 두줄, 즉 6글자씩 수록한 책 형태로 전해져왔는데 비석 3·4면의 일부가 빠져 있다.
류정한 학예연구관은 “3글자씩 이뤄진 탁본 자료를 비문의 각 위치에 배열하고, 규장각본과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고화질 자료를 협조받아 362자를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복제본이 실물보다 나은 디지털 재현의 또 다른 예는 박물관 1층 선사·고대관의 고구려 실감 영상관에 있다. 북한 내 벽화무덤 3곳(안악 3호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대묘)을 내부에서 360도로 느끼게끔 전면과 양 측면, 천장까지 총 4면에 프로젝터 영상을 투사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벽화무덤 속 인물·동물 문양이 생생하다.
2020년 공개 당시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장은정 교육과장은 “벽화 내부를 촬영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일부 유실된 부분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전해지는 모사도 등으로 보완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자료는 2006년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고구려 고분 10여기를 대상으로 공동조사를 했을 당시 찍어둔 것을 활용했다. 굴식 돌방무덤 내부의 벽 재질을 드러낼 수 있게 화강암·대리석 느낌을 가미하고 색채 등을 보완했다. 사신(백호·청룡·현무·주작) 등 중요 상징물엔 애니메이션 효과도 줬다. 가상현실(VR) 미디어아트에 친숙한 젊은 세대의 호응이 높다.
디지털 고구려 활성화는 국내 남아 있는 고구려 유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다. 고구려는 건국수도(졸본성)와 천도한 국내성·평양성이 모두 남한 외곽에 있어 신라·백제처럼 화려한 왕실 유물은 거의 없고 기와·전돌·토기 등이 대부분이다. 박물관 소장품 40여만 점 가운데 세부 시대 구분이 ‘고구려’로 등록된 소장품은 8150점(전체의 2%)뿐이다. 그나마 일제강점기에 수집·기증된 4000여점 가운데 중국·북한 지역 자료가 포함돼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활발해진 고구려 연구·전시는 2004년 표면화된 중국의 동북공정 영향이 크다. 고구려와 발해 등이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측의 고대사 왜곡에 맞서 남북한 역사학계가 북한 내 고분벽화를 공동조사한 게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서울대 박물관이 주도한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 군사유적(보루) 발굴도 재조명 받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사진 및 수집 유물을 토대로 한 ‘유리건판으로 보는 고구려의 도성’(201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 기와(중국 지역)’(2023) 등 보고서도 나왔다. 2012년 개관한 한성백제박물관은 제3전시실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를 비롯한 주요 고구려 유물을 특화해 전시하고 있다.
고구려 유적 전문가인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사학과)는 “이젠 중국도 한국의 고구려사 연구 성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실제 유적에 접근할 수 없다 해도 디지털 재현을 통해 고구려사의 존재감을 국내에서 더 키워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서 “북한·중국의 고구려 도성 관련 자료가 충분하니 광개토왕비에 이어 디지털 실감영상을 추진해볼만하다”고 의견을 냈다.
박물관 윤상덕 고고역사부장은 “고구려실에 대한 관람객 호응도가 높아 올해 안에 현재의 2배로 확장하고 최근 발굴성과와 디지털 신기술을 활용해 고구려사를 더욱 가깝게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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