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기업 밸류업, 숫자놀음보다 혁신이 우선이다

이동훈 2024. 2. 14.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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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방안
주주 중시하겠다는 긍정 신호

일본 베끼기와 증시 부양에만
매달리면 실패 답습할 가능성

예수의 가치 창출 가르침 새겨
미래 성장 유도 정책 꾀해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태복음 25장 29절)

예수가 제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일갈한 ‘달란트 비유’ 중 마지막 구절이다. 2000년이 지난 오늘 경제학계에선 자본주의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일컫는 문장으로 해석한다.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1969년 ‘동일한 연구 성과를 놓고도 유명한 과학자들이 무명의 과학자들보다 많은 보상을 받는 현실’을 보고 이 구절을 인용해 ‘마태 효과’라고 부른 게 효시다. 그러나 14절부터 읽어 보면 진의는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은 3명의 종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멀리 여행을 갔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열심히 장사해서 2배씩 늘렸지만 다른 한 명은 땅속에 숨겨놨다. 화가 난 주인은 1달란트마저 빼앗아 10달란트로 늘린 종에게 주며 훈계를 한 것이다. 각자 능력에 맞게 노력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지 같은 성과를 놓고 차별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은 금융의 본질마저 관통한다. 종잣돈 1달란트를 그대로 반환했지만, 시간 비용을 따지면 주인으로선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를 늘어놓은 건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방안과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내 주식의 고질적 저평가 해소를 위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마련 중인데 주가순자산비율(PBR)을 끌어올리는 방안이 시선을 끈다. 눈치 빠른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소각 방안과 고배당 발표로 정부 시책에 부응하고 있다. 홀대 받던 주주를 제대로 대접하겠다는 것으로 주식 투자자로선 환영할 만하다. 다만 대통령 언급 이후 PBR 1배 미만 기업 중심으로 테마주가 형성돼 주가가 치솟는 데 대해 나오는 우려의 목소리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자칫 증시 부양에만 매달리면 실적이 저조한 기업에까지 숫자놀음을 부추길 가능성 때문이다. 농부가 벼를 억지로 키우기 위해 순을 잡아뽑는 알묘조장의 폐해를 증시 부양책이 나올 때마다 반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되는 건 PBR이 낮다고 실적 하나로만 기업이 저평가됐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요즘 주가가 신고가까지 부쩍 오른 시중은행들을 보자. 5대 은행이 연간 수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면서도 주가가 낮은 것은 이자 수익에만 매달리는 후진적 경영에다 정부의 관치금융에 찌들어 있던 게 주요 원인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들은 어떤가. 수십 년을 구시대적인 부자 간 경영권 승계에 매달리고 사법리스크에 붙잡혀 있는 게 주가 도약의 발목을 잡는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과도한 상속세를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으로 지목한 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상속세를 갚으려고 주식을 내놓으면 지배구조에 악영향을 주고 시장에 물량이 늘어나 주가 하락으로 소액주주도 손실을 본다는 논리에 수긍이 가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높은 세율을 각오해 경영권 상속을 강행한 건 재벌인데 그 부담을 엉뚱한 곳에 전가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주주환원을 내세운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의 진정성에 의구심이 생기는 이유다. 주인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내는 청지기의 기득권 강화에 있다는 의심 말이다. 윤 대통령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책을 기업과 근로자의 계급 갈등을 완화하는 방안이라며 치켜세우는 게 상속세 완화에 대한 반대급부 차원이 아니길 바란다.

밸류업 프로그램이 일본 정책 베끼기에 그쳐선 더더욱 안 된다. 일본 증시가 호전된 건 PBR 제고보다는 ‘슈퍼엔저’를 용인하고 초저금리를 지속시킨 세계 최대 채권국의 저력에 있다. 일본이 지난해 3월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이후 저PBR 종목 주가가 6개월 만에 꺾인 걸 간과한 채 뱁새처럼 황새를 따라가다간 가랑이 찢어지기 십상이다. 이보다는 7대 주요 기술기업, 즉 매그니피센트(M7)를 보유한 미국처럼 미래 성장을 주도하는 혁신이 더 절실하다. 스마트폰 라이벌 애플이 지난해 포천지가 선정한 ‘존경받는 기업’1위에 17년 연속 오른 반면 삼성전자는 40위권에도 들지 못한 이유를 곱씹어 봐야 한다. 땅속에 몰래 숨겼다 꺼낸 달란트에서 흙만 털어낸다고 가치가 창출되는 건 아니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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