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의 우보천리] 경청의 힘

2024. 2. 1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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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에 화제가 되는 책 한 권이 있다. 철학자 김만권씨의 저서 ‘외로움의 습격’이다. 저자는 책에서 21세기 인공지능(AI)에 의해 주도되는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시대를 ‘외로움의 세기’로 규정한다. 문명은 분명히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명이 인간을 오히려 고립·원자화시켜 외로움이 일상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55%가 일상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도 무려 46%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공동체성을 본질로 하는 교회로서는 충격적이고 부끄러운 수치다. 그만큼 이미 우리 사회에서 외로움은 일반현상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김씨는 외로움의 심연(深淵)은 AI디지털 정보통신 사회가 낳은 인생관으로 인해 더욱 확대 재생산된다고 본다. 바로 ‘능력주의에 입각한 자기책임윤리’다. 여기서 자기책임윤리는 ‘내 인생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인생관이다. 이 인생관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당연히 사회는 능력주의가 전제돼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와 권력과 명예가 계급 신분 혈통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 자체에 의해 분배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능력주의적 자기책임윤리 사회에서 인생은 경주요, 각자도생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글과 같다. 철저히 모든 삶의 짐은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 그렇기에 삶에서 오는 온갖 고난과 역경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자 책임이 된다. 우리는 옆에서 함께 경주를 펼치는 사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을뿐더러 달리다가 발을 삐끗해도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옆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앞을 내달려 가는지 알고 있으며 자신도 넘어지기 전까지는 같은 생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도움을 청하는 순간 그는 ‘민폐’가 돼버린다. 이런 동안에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지고 고립되어 가며 속으로는 병이 들어간다. 이번에 15세 청소년이 여당 국회의원을 무차별 테러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심리적 병증이 특정한 신념과 만나면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바로 ‘영혼의 친구’다.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의 온갖 다양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 말이다. 각자도생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자기 삶을 살기도 바쁜데 남 이야기에 귀 기울일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두세 시간을 떠들고 일어나도 우리 가슴에는 솔바람이 불어온다. 각자 얘기를 쏟아놨을 뿐이기에. 그래서 영혼은 자기 내면의 신음을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하다. 바로 ‘경청’(listening)의 사람, ‘경청’의 공동체다.

여기서 경청은 소리의 주파수를 듣는 물리적 들음(hearing)이 아니다. 상대의 소리를 타고 전달되는 음색·느낌·감정을 듣는 것이다. 더 나아가 소리가 나오는 배 끝의 정서와 영혼의 떨림을 듣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하는 사람의 정서와 하나 되어 들어주는 것이다. 이 경청이 제대로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화자는 자기 영혼의 떨림에 반응해주는 사람에게 용기를 얻고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점점 깊은 곳의 사정을 개방한다. 대화가 끝나면 엄청난 해방감과 기쁨이 찾아온다.

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변화가 일어났을까. 성경에 드러나지 않는 경청의 힘이다. 수가성의 여인, 세리 삭개오, 니고데모가 하나같이 예수님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한 영혼의 아픔과 떨림에 공감하고 경청해주시는 주님을 통해 위와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한 것이다. 현대인은 경청해 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진리를 주장하고 외치는 공동체뿐 아니라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줄 공동체가 간절하다. 21세기 교회의 선교도 외쳐 주장하는 선교가 아닌 경청해주는 선교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외로움에 진저리치는 현대인을 위한 또 하나의 사랑의 표현이다.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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