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건국전쟁'이 말하지 않은 것
영화 ‘건국전쟁’을 보며 문득 공로명 전 외교장관이 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말년이 떠올랐다.
“이 대통령은 4·19 이후 하와이로 간 다음 뇌일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미 육군병원에서 요양했다. 당시 자주 문병했던 이동진 목사에 의하면 말년의 이승만 박사는 영어를 다 잊어버려 한국어로만 통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영어를 잊어버린 이승만 박사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나의 외교노트』)
이 전 대통령의 영어 구사력은 남달랐다. 당시 외무부가 경무대(지금의 대통령실)에 올리는 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했을 정도라고 한다. 건국과 한국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으로 이어진 격랑의 외교 속에서도 이 전 대통령의 영어는 빛났다. 그런데 영어를 잊었다? 하기야 우린 건국(nation building) 과정에서 그의 분투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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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학적 사관의 콘텐트 양산되던 중
이승만의 공 크게 부각한 다큐 인기
역사는 선악문제 아냐, 진영화 곤란
」
사실 이 전 대통령의 마지막에 대한 동시대 지식인들의 기억은 썩 좋지 않다. 당시 현장 기자였던 조용중은 ‘이승만 12년 왕조’라고 했다. 1954년 4사5입 개헌부터 59년 조봉암 사형으로 이어진 50년대를, 이승만 독재를 지탱하기 위한 격동의 연속이라고 봤다. 다만 조용중은 4·19 직후 부산 데모대를 지켜보던 야당 의원이 “여보, 조 동지, 저건 난동이야. 지금은 아직 이 대통령이 있어야 돼. 학생들이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을 때 아무런 이론(異論)을 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건국 과정의 냉철한 관찰자였던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의 시각도 미묘하다. 리더십은 인정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반면 이승만은 방향감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또 민주주의 수행에 그가 과연 진실성을 갖고 있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리고 그의 경제적 지식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지도자였다. 당시 혼란했던 정세 아래서 철수를 단행한 미국으로선 이러한 인물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통치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고 행태도 일본 것 그대로였다고 봤다. 정치적 기능과 정신은 조선시대의 현대판이라고 인식했다. 특히 부정부패를 두곤 “당시 다방가에 유포되던 소문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때 각료 129명 중 재임 중 재산을 늘리지 않은 건 단 두 명인데, 한 명은 어리석을 정도로 정직하고 금욕적이었던 변영태 외무장관이었고 한 사람은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서 미처 이권에 손을 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국전쟁’이 다큐멘터리라,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엄밀하게 보면 취사선택한 사실의 나열이다. 상당 부분 맥락이 소거된 채다. 덕분에 이 전 대통령의 공은 크게 증폭됐고 과는 크게 축소됐다. 이승만 정권은 놀라운 성취 못지않게 재난적 말로를 보였다. 다큐는 진실의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더라도 불편하기보단 반가웠다. “(영화판에) 좌파가 99.9%”란 김덕영 감독의 말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동안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해 자학하는 내용의 콘텐트만 양산됐기 때문이다. 교과서까지 그러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실관람평에서 ‘어디까지 진실인지 혼돈스럽다. 내가 배운 역사와 너무 달라. 진실이라면 교육 당국 사형시켜야 함’이란 글을 봤다. 이해한다. 지금 현대사는 진영전의 무기다. 이 전 대통령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정당이 원내 1당이다. 그 당의 원내대표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란 말도 했다.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기라도 한 모양이다. 역사는 선 또는 악 사이 택일이 아니다. 그사이 어디쯤이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극장 안 곳곳에선 울음소리가 들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 정상은 아니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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