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스티븐 연의 영어가 한국어로 들릴 때 [홍종선의 연예단상㊵]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외치고 싶을 만큼 배우 스티븐 연이 달라졌다.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 2018) 땐 분명 한국어를 쓰는데 영어처럼 들렸고, 미국 드라마 ‘성난 사람들’(감독 이성진, 2023)에서는 99% 영어로 말하는데 한국말 같다.
연기 잘했다는 건 제81회 골든글로브와 제75회 에미상에서 각각 TV 리미티드 시리즈·영화 부문과 TV 미니시리즈·영화 부문의 남우주연상을 석권한 걸로 이미 알려졌다. 실제로 보니 ‘성난 사람들’의 스티븐 연은 눈을 뗄 수 없게, 계속해서 관찰하고 싶게 생생하고 세밀한 연기를 펼친다.
기본 바탕에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분노와 박탈감, 우울감이 자리해 있다. 돌출적으로는 타인의 작은 말이나 행동, 상황 변수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이 표정과 몸짓에 그대로 드러난다. 내면의 끓어오르는 마그마 같은 패배감, 외면의 잘해 보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이질감 없이 대니 조에게 어우러져 있다.
분명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서두에 적었듯 한국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한국어처럼 들리고 조금의 이질감 없이 스티븐 연의 몸을 빌린 대니가 단숨에 가슴을 파고든 걸까.
미국에서 뿌리내리려 하지만, 동양인으로 힘겨운 삶을 사는 게 같은 동양인으로서 안쓰러워 보여서였을까. 번듯하게 자수성가해 부모님 모셔 와 집도 지어 드리고 장남 노릇 제대로 해 보려는 대니의 모습에서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보여서였을까.
교회에 처음 방문했을 때, 마치 정말로 신을 느낀 사람처럼 스티븐 연이 ‘신들린’ 연기를 해서일까. 10부작인데 너무 초반부터 센 연기, 명장면 나온 거 아닌가 싶었더니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명연기를 계속 끄집어내서일까.
‘공감’이다. 장소가 미국이어도 한국에서 태어나 조성현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소년의 고단한 타국 적응기, 마음과 달리 자꾸만 꼬여버리는 인생이 오늘 우리네의 팍팍한 삶과 다르지 않다. ‘내 얘기’ 같은 ‘네 이야기’에서 오는 동감이 미국 배경임을 잊게 하고 영어를 우리말처럼 이해하게 만든다. 기다란 버거 하나 먹는 것부터 남의 화장실에 오줌 갈기고 신나 하는 모습까지 스티븐 연이 어찌나 연기를 실감 나게, 차지게 하는지 현실감을 배로 키운다.
‘버닝’ 때는 미국에서 온 배우 스티븐 연, 우리는 가난한데 너만 부자인 ‘검은 머리 외국인’(실제로 그런가도 영화에서 명확히 확인해 주지 않지만) 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미국의 유명 드라마 ‘워킹 데드’의 배우여서인지, 바로 한 해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2017)에 출연했으나 미국인 역할이어서 그랬는지 아직은 ‘낯’이 설었다.
한국영화 ‘버닝’, 넷플릭스 영화 ‘옥자’에 이어 미국영화지만 한국계 감독에 윤여정·한예리 등 한국의 배우들이 출연해 우리 영화 같은 ‘미나리’가 친숙함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10부작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로 스티븐 연은 ‘우리 배우’가 됐다. 미국 제작사 A24가 만든 작품인데도 말이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추천하는 이유가 우리가 아끼는 스티븐 연이 나와서만은 아니다. 최근 본 드라마 가운데 가장 신선하고, 시작은 좋으나 끝이 미미한 드라마가 많은 가운데 ‘엔딩마저도’ 실망감을 주지 않는 명작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치졸하게 악할 수 있는가’를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들어 앉혀 목도시킨다. 스티븐 연이 수상한 골든글로브와 에미상의 같은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앨리 웡(에이미 라우 분), 두 배우의 대찬 폭주와 찰떡 호흡이 시청자를 붙드는 힘이다.
특히, 끝을 모르고 대립하던 대니와 에이미가 드넓은 산기슭에서 생사의 경계를 오갈 때,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된 듯 주고받는 대화 장면은 놓치면 아까운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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