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에 최고형 선고했지만…전재산 날린 피해자, 얻은 게 없다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전세 사기 광풍, 그 이후
보증금 기약 없는데 유지·관리 이중고
미추홀구는 북쪽으로 국철 1호선이 관통하고, 수인분당선과 인천2호선이 각각 동북쪽과 남서쪽을 지난다. 몇몇 재개발 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 신축 공사가 진행중이지만 대부분 빌라와 나홀로 아파트들로 채워진 곳이다. 교통은 편리한데 전셋값은 낮아 수도권에서 직장을 잡은 신혼부부나 독신 청년들이 대거 몰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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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전세사기에 2700여 세대 피해 발생
경매 중단됐지만 건물 유지·보수 손 못대, 삶의 터전 붕괴중
우선매수·LH매입 등은 효과 못내…특별법 개정은 ‘논란중’
남헌기 징역 15년,‘범단’ 인정돼도 더 안늘어… 환수도 미미
」
이곳에서 ‘건축왕’ 남헌기씨가 기업형 전세 사기를 벌였다. 빌라 몇 개를 모아 재건축 형식으로 1~3개 동의 아파트를 지은 뒤 공인중개사를 끼고 매매가보다 높은 가격에 전세를 놓았다. 초기 자금은 차입으로 해결했기에 건물은 모두 금융기관 선순위 담보로 제공됐다. 이 빚을 전세보증금으로 해결한 뒤 다시 돈을 빌려 비슷한 아파트를 짓는 식이다. 그러다 금리가 오르고 전셋값은 떨어지며 이자를 갚지 못할 형편에 이르자 건물들이 경매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세입자들은 대부분 후순위여서 보증금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다.
도원역부터 제물포·도화·주안 ·간석역까지 1호선 라인을 따라 남북으로 늘어선 나홀로 아파트와 빌라들이 대부분 피해 주택이라고 했다. 설 명절을 한 주 앞둔 지난 2일 찾아간 주안역 부근 S아파트에는 필로티 구조의 1층 주차장 한켠에 콘크리트 잔해가 잔뜩 쌓여있었다. 심한 비바람에 외벽 마감재가 떨어져 내렸지만, 보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떨어진 외벽에 맞은 연통이 빠져 가스보일러를 틀 수 없게 된 세대도 있었다. 낙하물에 맞아 파손된 차량 보상도 바라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아파트에 사는 강민석 씨는 “대부분의 세대에서 누수로 천장이 부서지거나 벽에 곰팡이가 끼고 물이 올라와 바닥재가 다 들뜨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수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전했다. 제물포역 인근 H아파트는 인도를 주차 차량이 온통 점령한 상태였다. 주차타워가 고장 나 사용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사기범 남씨는 하늘종합주택이란 관리회사도 차려 세입자로부터 꼬박꼬박 관리비를 받아갔다. 그런데 이 돈 일부를 횡령하고 남은 돈도 묶이면서 큰돈이 들어가는 유지·보수는 전면 중단된 상태다. 관리업체를 믿을 수 없게 된 주민 일부가 관리비 납부를 거부하자 전기료 연체를 이유로 관리업체가 배전반을 무단으로 뜯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건물 유지·보수 문제는 전세 사기가 발생한 다른 도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강서구청이 전세 사기 피해자 355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70.3%가 건물 유지보수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증금 회수는 막막한데. 사건이 장기화하면서 피해자들의 삶의 터전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다.
숨통은 트였지만, 구멍 큰 특별법
미추홀은 피해 규모도 크지만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집단 대응을 하기 시작한 곳이다. 그 중심에 안상미(45) 씨가 있다. 그는 2020년 미추홀구 숭의동 H아파트에 보증금 7200만원의 전세로 입주했다. 한차례 계약을 갱신한 직후인 2022년 7월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두 동짜리 아파트 100여 세대가 모두 같은 처지였다. 변호사비를 아끼기 위해 공동대응에 나섰는데 인천지역 피해자 대책위원회로 발전했고, 도시별 연합체인 전국 대책위도 책임지게 됐다.
대책위가 활동하던 지난해 6월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은 ▶피해자 인정 ▶경(공)매 중단 ▶우선매수청구권 인정 ▶LH 매입 후 재임대 ▶금융지원 등이 골자다. 지난달 기준 전세 사기 피해지원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피해 가구 수는 1만 944채에 이른다. 이들이 신청할 경우 법원은 일단 경매를 중단한다. 당장 거리로 나앉는 걱정은 일단 면했다.
특별법에 규정된 경매 유예는 최장 1년까지다. 그런데 올해 들어 다시 경매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 빨간 딱지로 도배된 지역별 경매현황 지도가 나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이 대표적인데, 미추홀 역시 위험 반경에 들었다.
우선매수청구권도 효과가 있을지 불투명하다. 법에 청구권을 부여한다고만 돼 있고 언제,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세부사항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경매가 진행돼 누군가 낙찰을 받으면 그 가격에 청구권을 쓸지 결정해야 한다. 그나마 서너번 유찰이 돼 경매가가 내려가야 시세와의 차액으로 보증금을 어느 정도 벌충할 수 있다. 그 전에 낙찰되면 청구권을 써봐야 짐만 떠안는 셈이다. 최근엔 경매꾼들이 붙으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안 위원장은 “전세 사기 피해자의 집은 제발 입찰을 피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나마 경매 낙찰금을 낼 수 있는 피해자는 극히 일부다. 보증금이 전 재산인 대부분의 피해자는 LH의 매입 후 재임대에 기대를 걸었다. 주변 월세의 35~50% 수준에서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홍보는 거창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매입이 이뤄진 곳은 한 곳에 불과하다. LH가 매입하려면 서류상 하자는 없어야 하는데, 피해 아파트 특성상 도면과 실제 구조가 다르거나, 허가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곳이 많아 번번이 매입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매입이 안 되면 다른 임대주택을 내준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남은 희망은 특별법 개정이다. 지난해 말 야당 단독으로 상임위를 통과했는데, 정부와 여당이 반대해 법사위에 묶여 있다. 핵심 쟁점은 '선구제 후구상' 방안. 사인 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를 세금으로 메워줄 수 없다는 논리는 넘기 힘든 벽이다. 피해자들은 "건설사들의 PF 부실은 지원하면서 서민들의 전세 피해는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하지만, 법이 개정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법정 최고형이 남긴 과제
미추홀을 둘러보고 며칠이 지난 7일, 인천지방법원 형사 법정 324호실에선 남 씨 일당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30석 남짓한 법정은 피해자들로 가득 찼고, 좌석 뒤쪽이나 옆에서 서서 듣는 방청객도 많았다.
재판장인 형사1단독 오기두 부장판사는 형량 선고에 앞서 재판부에 접수된 피해자들의 사연을 읽었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파산한 스물 여섯살 청년, 365일 야간작업하며 받은 200만원 월급을 날린 가장, 딸 결혼식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자살을 시도한 아버지…구구절절한 사연이 법정을 채우는 동안 뒤쪽에선 울음과 한숨 소리가 퍼져나갔다.
이날 오 부장판사는 남 씨에게 징역 15년, 나머지 일당들에게 4~13년을 선고했다. 사기죄는 최고 형량이 징역 10년이다. 범행이 여러 건이면 절반까지 가중할 수 있다. 대검찰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99명이 전세 사기 혐의로 기소됐고, 이 중 358명은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최근 주범들에게 속속 법정 최고형이 선고되고 있다. 하지만 단일 사건 피해자가 1000명이 넘고 대부분 피해 회복이 안된 점을 고려할 때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오 판사가 형량 선고 후 별도로 “현행법은 악질적인 사기 범죄를 예방하는데 부족하다”고 덧붙인 이유다.
남 씨는 다른 재판부에서 범죄단체구성죄에 대한 재판도 받고 있다. 인천지검 관계자는 “'범단'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더는 형량을 높일 수는 없지만, 범죄수익금 추적과 환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1개 조직이 범단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환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기사 취재에 이유정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최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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