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대북 접촉 외면하다 북·미 직거래에 또 당할라
북한 문제를 우리가 주도하려면
트럼프는 이전에도, 만약 그가 202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북한이 핵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북핵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에서 전략전력개발 부차관보를 지냈던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는 『강대국 갈등 시대의 미국 방위 전략』이라는 책에서 북한과의 협상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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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대 닉슨의 데탕트와 유사했던 트럼프 행정부 때의 대북 정책
가치외교 대신 미 공화당의 고립주의 정책 노골적으로 표현·실행
68년 안보위기, 94년 제네바 합의 때도 한국은 북·미 회담서 소외
능동적인 대북 대처와 대중 관계 복원으로 통미봉남 전략 막아야
」
북·미회담을 강조한 트럼프
현재 상황을 보면 트럼프의 재당선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법 리스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반 공화당 후보 결정 과정에서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으며, 작년 12월 초까지 주요 경합 주(swing state) 7곳(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네바다, 애리조나)에서 모두 바이든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처럼 한 번 대통령을 했다가,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고, 그다음 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가능하다. 미국의 헌법은 이를 금지하지 않고 있다. 1885년 2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는 23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지만, 24대 선거에서 다시 승리해서 1893년부터 4년간 재임했던 기록이 있다.
닉슨의 재현?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트럼프 재임 동안의 제반 정책을 뒤돌아볼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서는 1970년대 초 닉슨 행정부의 향기가 났다. 두 사람은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취임했다. 닉슨(Richard M Nixon)은 베트남전쟁의 후유증을 경험했고, 트럼프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시작을 경험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공화당 소속이며, 미국 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했다.
닉슨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데탕트를 선택했다. 전 세계적으로 위기를 완화하고 해외에 있는 미군을 철수 또는 감축함으로써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다. 베트남과 태국에서 미군 철수, 한국과 필리핀에서 미군 감축이 실행되었다. 마오쩌둥을 만났고, 소련과 핵 감축을 합의했다. 재정과 경제를 살리기 위해 가치외교를 포기했다.
한반도에서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7·4공동성명(1972)을 발표했고, 유신체제 아래에서 6·23 선언(1973,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및 공산주의 국가에의 문호 개방 등)을 하는가 하면 불가침 조약을 북한에 제안(1974)했다. 이러한 제안은 남·북한을 미·일·중·소가 교차승인해야 한다는 키신저(Henry A Kissinger)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리고 아마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없었다면 주한미지상군은 1975년까지 완전히 철수했을지도 모른다.
가치외교의 포기
트럼프는 미군이 주둔하는 국가의 분담금 인상을 들고 나왔다. 단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는 일본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까지 압박했다. 나토 소속 국가들이 규정에 있는 2%의 군사비 부담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토에서 탈퇴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유네스코와 파리기후협약에서도 탈퇴했다. 유네스코가 이스라엘에 불리한 입장을 보인다는 점, 파리기후협약이 미국의 에너지 정책에 반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쩌면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솔직한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공화당의 고립주의적 정책을 외교적 수사 없이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실행했다.
트럼프에 비한다면 닉슨은 뒤통수를 치는 스타일이었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에 파병할 때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에 대해 한국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닉슨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71년 7사단을 전격 철수시켰다. 같은 해 군사정전위원회 대표를 미군에서 한국군을 바꾸려 했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 이양도 고려했다.
김정은의 편지
트럼프는 직접적으로 동맹국인 한국을 압박할 것이다. 주한미군 주둔비 분담 요구액이 지금보다 훨씬 더 증가할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부각하기 위해 북한과의 협상을 다시 추진할 것이다. 문제는 남북관계가 좋다면 북·미 간의 협상에 한국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북·미회담의 재개는 한국을 소외시킬 가능성도 있다.
2019년 하노이 회담 전후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의 편지는 그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2018년 9월 21일 자의 편지에서 김정은은 “앞으로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는 남조선 대통령 문재인이 함께하는 게 아닌, 각하와 제가 직접 논의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들에 문 대통령이 보이는 과도한 관심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
하노이 회담이 실패한 이후에는 트럼프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2019년 8월 5일 자 편지를 통해 “한국과의 ‘군사 게임’과 ‘전쟁 연습’이 끝났을 때 제게 다시 연락을 주기 바랍니다. 그때 실무급 대화의 시간과 장소를 논의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북·미회담이 재개될 수 있는 조건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북·미회담서 소외됐던 한국 정부
어쩌면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질 때의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조문 파동이 일어나 남북관계가 악화한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제네바 합의를 만들어냈고, 한국 정부는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러나 막상 제네바 합의에 따른 북한의 경수로 건설은 대부분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1968년 안보위기 속에서도 한국 정부는 북·미 간의 판문점 양자 회담을 지켜만 봐야 했다.
최근 김정은과 김여정의 발언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 크게 하고 있다. 2023년 12월 이후 김정은은 몇 차례의 공식 발언을 통해 “한국 괴뢰 족속들을 우리의 전정에 가장 위해로운 제1의 적대국가,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유사시 그들의 영토를 점령, 평정하는 것을 국시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김정은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하지 않았던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한 것이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 이래 남북이 어떤 갈등을 빚어도 북한은 ‘통일’이라는 큰 목표를 거두지 않았다. 북한이 1973년의 6·23 선언을 비판한 것은 두 개의 한국을 반대한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1991년 남북한의 유엔 가입 이후에도 북한은 모든 정상회담에서 ‘통일’을 철회하지 않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2024년 1월 2일 김여정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신년 메시지’는 한술 더 뜬다. “문재인의 그 겉발린 평화 의지에 발목이 잡혀 우리가 전력 강화를 위해 해야 할 일도 못 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한 것은 큰 손실”이라고 했다. 이제 더 이상 남한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필요하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이 정권 연장을 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다. 우크라이나나 이스라엘 등 시급한 문제로 인해 한반도 문제는 뒷전인 상황이다. 통일을 포기한 북한이 갈등을 일으키면 미국은 지난 70년과는 달리 한국의 보복을 승인할까?
트럼프의 성향과 김정은의 발언을 모두 고려하면 1968년이나 1994년의 상황이 다시 한번 재현될 수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남한을 고립시킨다는 ‘통미봉남’ 얘기가 다시 나올 수도 있다.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과의 접촉을 재개해야 한다. 협박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리고 북한의 도발에 유일하게 억지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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