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로우대 폐지 공약, 통계 왜곡 아닌가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주요 공약으로 ‘지하철 경로우대 무임승차제’를 폐지하고 대신 월 1만원의 교통카드를 전국 노인들에게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발끈한 대한노인회 김호일 회장이 이준석 대표와 라디오 방송에서 ‘맞장 토론’했다.
그런데 방송 마감 직전에 이 대표가 질문을 던진다. “4호선 51개 지하철역 중에서 무임승차 비율이 가장 높은 역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어딥니까” “경마장역입니다.” “오…” “예. 그러니까. 저는 이게 어떻게 젊은 세대에 받아들여질지 한번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이 반론할 틈도 없이 방송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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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신당 주요 공약 놓고 논란
젊은세대 부정적 인식만 자극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나
」
의아하지 않은가. ‘무임승차가 가장 많은 역’을 추정한다면 탑골공원이 있는 종로3가역이나 환승객이 많은 영등포역을 꼽지 않을까. 실제로 지난해 12월 기준 ‘서울 지하철 호선별, 역별 유·무임 승하차 인원’ 통계에 따르면 월간 무임승차 인원은 종로3가역이 31만 명으로 제일 많았다.
그러면 이 대표는 왜 경마장역이라고 했을까. 그의 말을 살펴보면 ‘4호선 51개 지하철역 중에서’라는 단서가 붙었다. 그의 말대로 ‘4호선’ 중 무임승차 인원이 가장 많은 역은 창동역(22만 명)과 수유역(20만 명)이다. 그런데 좀 더 주의 깊게 보면 무임승차 ‘인원’이 아니라 ‘비율’이라 했다. 지하철 4호선 중에서 무임승차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동작역(33%)이다.
하지만 ‘4호선 지하철역’ 중에는 경마장역이 없다. 이 대표가 언급한 경마장역은 지하철 4호선의 연장선인 과천선 경마공원역을 말한 것 같다. 경마공원역을 경마장역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 비난하긴 어렵다.
과천선을 포함하면 경마공원역의 무임승차비율이 43%(인원으로는 9만 명)로 가장 높다. 그렇다면 이 대표는 왜 과천선을 지하철 4호선에 포함했을까. 다시 보면 이 대표는 ‘지하철 4호선’이라 하지 않고 ‘4호선 51개 지하철역’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 4호선은 26개 역뿐이다. 여기에 과천선 8개 역, 안산선 13개 역, 진접선 4개 역을 합해야 51개 역이 된다.
서울 지하철 4호선에 3개 외곽 연장선을 합친 전철의 공식 명칭은 ‘수도권 전철 4호선’이다. 이를 이 대표는 ‘4호선 51개 지하철역’이라고 뭉뚱그린 듯하다. 수도권 전체 전철역 중에 무임승차 비율이 가장 높은 역은 연천역(66%)이다.
이처럼 이 대표가 “4호선 51개 지하철역 중에서 무임승차 비율이 가장 높은 역”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의 행간을 얼마나 잘 따져서 읽어야 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자칫 전체 지하철인지, 지하철 4호선만인지, 아니면 수도권 전철 4호선인지, 무임승차 인원인지 또는 비율인지 혼동하기에 십상이다.
이런 혼동을 활용해 젊은 세대가 경로우대 무임승차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점을 유도·강조하려 의도했다면, 정말 탁월한 어휘 선택이자 통계자료 선택이라고 무릎을 칠 만하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상인이나 정치인의 말에서 쓸만한 정보를 추출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는가를 이번 사례는 여실히 보여줬다. 그 비결의 요체는 말한 부분이 아니라 말했을 법하지만 말하지 않은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다. 왜 종로3가역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되묻는 식으로 말이다.
경마공원역의 높은 무임승차비율에 대해선 다른 해석도 있다. 상업지역인 명동역의 무임승차 비율이 가장 낮지만, 경마공원역에는 정기적으로 통학·통근하는 사람이 드물다. 경마공원역은 평소엔 황량할 정도로 한산하다가 경마장이 열리는 주말 개장과 폐장 시간에 손님이 집중돼 불법 무임승차자 단속이 어렵다고도 한다.
2022년 자료에 의하면 경마장에 출입하는 사람의 연령대별 비율은 20대 12.4%, 30대 23.8%, 40대 22.7%, 50대 19.4%, 60대 이상 21.7%였다. 노인층 비율이 유달리 높은 게 아니라 연령대별로 대체로 고른 분포를 보였다. 65세 이상에 제공되는 경로 무임승차제 폐지는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겠지만, 굳이 경마장과 연관시킨 것은 유감이다. 보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면서 내 말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통계적 왜곡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세진 인하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서울사회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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