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시선] 반전 판결을 ‘역지사지’해야 하는 이유
그 새벽의 열광은 온데간데없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입국장엔 엿이 던져졌다. 수퍼스타 출신 해외파 감독이 타깃이 됐다. 그의 전술 부재에 대한 비판은 한국대표팀이 졸전 끝에 참패한 순간, 무너지는 둑에서 물이 터져 나오듯 쏟아졌다. 이전 두 차례의 역전 드라마 때에도 “축구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이라고 비아냥을 받았지만, 이겼으니 용서가 됐던 셈이다.
그러나 감독을 향한 급발진 비판을 하던 이들도 찜찜한 이견에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우승컵을 맡겨 놨던 것도 아닌데…중동 축구 붐이 간단치 않네…선수들도 부족함을 느꼈다는데…김민재가 빠져서 팀 밸런스가 무너졌겠지…일본을 만났다면 이겼을까….’ 합리적인 의심의 끝에 스스로에 대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찾아온다. 전문가들을 비난하기엔 축구 지식은 알량했고, ‘국뽕’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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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뽕으로 아시안컵 우승 확신
합리성 없는 유죄 예단과 비슷
열린 자세로 반전에 대비해야
」
국대 축구를 무작정 비난하다 현타가 온 것처럼 최근 법원의 판결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부터인가 빈약한 근거로 당연시했던 것들의 반전 결말, 뒤이어 찾아오는 판단력 공백에 대한 자책, 그리고 그 헛헛함 말이다. ‘사법 농단’과 ‘삼성 불법 경영권 승계’ 무죄를 보며 적지 않은 시민은 현실 자각 타임을 맞았을 것이다. 대명천지에 부장판사 3명이 모인 재판부(대등 재판부)가 턱없는 결론을 냈겠는가. 단호한 확신은 근거 불명이었고 합리적 의심은 가출 상태였다. 경기의 승패와 판결의 유·무죄가 엇갈릴 수 있는 게 세상의 이치이거늘, 무슨 근거로 우승컵을 안방에 둔 것처럼 우승(유죄)을 확신했을까.
지난달 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내려진 사법 농단 혐의에 대한 판결은 기소된 47개의 범죄 혐의가 모두 무죄라는 판단이었다. 직권남용·직무유기·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에 대해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으니 남용죄가 성립하지 않고,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의 재판 개입에 판사들이 신경 쓰지 않았기에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건 아니다’는 취지였다. 사법행정 안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움직임이 검찰의 눈엔 선 넘은 것이었을 수 있지만, 법원이 무죄를 선언했으니 지난 4년 11개월간 양승태 코트를 ‘농단(壟斷) 세력’으로 단정해버렸던 시민들은 미안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지난 5일 무죄 판결의 양상도 비슷하다. 진보 진영의 시민단체가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을 주장한 때로부터 약 8년 만의, 기소된 때로부터 약 3년 5개월 만의 1심 판결이었다. “합병에 사업상 목적이 있어 경영권 승계가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 “합병 과정에서 삼성물산 및 삼성물산 주주의 이익이나 의사가 도외시된 바 없고, 오히려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 및 경영권 안정화는 삼성물산 및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무죄 판결 취지엔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수사심의위원회가 불기소 권고를 했어도 무죄 판결이 나기 전까진 선뜻 동의하지 못했던 실체적 진실이다. 검찰의 항소 이유처럼 2심 법원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지만,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글로벌 기업 회장을 그 정도의 의심으로 범죄자로 간주한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더욱 혼란스러운 건, 옳고 그름에 그토록 단호했던 정치권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그들은 논리적·정서적 혼란을 겪는 시민들보다 속사정이 더 시끄러워 보인다. 보수·진보 진영 모두 예전처럼 날을 벼리기 쉽지 않은 처지다. 여권은 일인자(윤석열 대통령)와 이인자(한동훈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가 사건을 지휘한 검찰 출신임에도 판결에 우호적인 지지층을 거스르기 어렵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사회 통합을 얘기하고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무죄 피고인들을 집요하게 공격해 온 야권은 자칫 적장(윤 대통령, 한 위원장)을 대변하게 될까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2심에서도 실형이 선고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법정구속을 면하자마자 총선 출마 채비를 하는 상황이니 무죄 선고에 토를 달 형편도 아닐 것이다.
반전(反轉)의 무죄 판결은 간단치 않은 과제를 던졌다. 아노미 같은 상황을 벗어나려면 시민사회가 보다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영의 한 사람의 판단을 맹종해서는 앞으로 벌어질 미지의 반전을 견뎌낼 수 없다. 반대 진영에서 다른 목소리를 냈던 이들은 강제로 주어진 역지사지의 기회를 잘 활용했으면 한다. 그런 열린 자세를 갖추지 않고선 허구한 날 내로남불을 욕하고 춘풍추상(春風秋霜)을 읊어도 뫼비우스 띠처럼 제자리에 서 있을 게 뻔하다.
김승현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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