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아내’ 버리고 이름 얻은 ‘프리다 칼로’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2. 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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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유명할 수 없다’…부부 화가의 딜레마

부부가 같은 길을 가는 예술가라면, 그것도 다른 장르가 아니라 같은 그림을 그린다면? 그들에게 행복한 공존은 가능한 것일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부 화가 중 동등한 명성의 소유자가 존재할까? 조형미술에 한해 볼 때 화가 부부가 둘 다 유명한 경우는 거의 없다. 예술이란 한쪽의 희생이 가능할 때 꽃피울 수 있는 잔인한 장르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예술은 마치 야훼처럼 질투심 강한 존재로서, 자신에게 철저히 몰입하고 집중했을 때만 은총을 내린다.

성공한 예술가 부부로 단박에 프리다 칼로(1907~1954년)와 디에고 리베라(1886~1957년)가 떠오른다. 이들에 견줘 아내의 처절한 희생으로 남편만 돋보였던 화가 부부로는 에드워드 호퍼와 조세핀 호퍼가 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는 그 명성이 역전된 예술가 부부로도 유명하다. 살아생전 남편 디에고는 남미의 피카소로 칭송될 만큼 훨씬 유명인이었는데, 사망 후에는 부인 프리다가 세계적으로 더 사랑받는 작가가 됐다.

이 부부는 그림을 두고 어떤 경쟁을 했을까? 사실 프리다는 남편을 라이벌로 생각한 적도 없다. 결혼 초기만 해도 프리다는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취미 정도로만 여기고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저 그녀는 재치 있고 천재적인 유머 감각을 발휘해, 순종적이며 능란하고 섬세한 지배력으로 남편과 집안을 관리하는 살림 잘하는 여자로서 만족하는 듯 보였다. 결혼 생활의 심각한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프리다가 진정 훌륭한 예술가로 거듭날 것이라는 가능성은 도처에 있었다. 바로 독특한 사고방식 때문! 부부는 결혼 초 집을 지을 때 건물을 두 채로 분리하고 각자 작업실로 사용했는데, 두 건물을 연결하는 교각을 만들어 서로 소통했다. 이 다리는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부부의 독특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각자가 독립된 공간에서 창조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각자의 은밀한 사교 생활도 할 수 있었던 것. 특히 그곳에서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남편의 기꺼운 동의 아래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결혼 전 성을 그대로 갖고 살았다.

또 하나 두 사람은 이혼하고 1년 만에 다시 재결합하는데, 그때 내세운 프리다의 조건이 무척 그녀답다. 그녀는 디에고의 불륜 때문에 평생 고통받았는데 특히 주변 사람, 그중에서도 여동생 크리스티나와의 불륜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이혼도 재결합도 디에고가 원했다. 여하튼 프리다가 요구한 재결합의 조건은 그녀가 얼마나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여성인지 가늠하게 한다. 그 조건이란 재정적인 면에서 독립하겠다는 것과 성관계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재정적인 독립을 원하다니?!!

프리다는 결혼한 지 13년 만의 강압적인 이혼 요구에 선뜻 응했지만, 이들의 이혼은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 그녀는 디에고의 서신을 처리하고 사업상 거래를 돕는 등 살뜰히 보살폈다. 혹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평생 그를 사랑할 거라고 말하고는 했다. 두 사람은 사적이든 공적이든 외부 초대에 여전히 부부처럼 동반했다.

사실 프리다의 명성은 사망 직후에 얻은 게 아니다. 그녀는 이혼 직전부터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12년 만인 1938년 멕시코시티대 갤러리에서 그룹전을 가졌는데, 이 전시를 본 앙드레 브르통의 주목을 받았고, 이 초현실주의 거장의 후원으로 파리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게 됐다. 이때 칸딘스키, 피카소 등 당대 저명한 화가들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극찬을 받는다. 게다가 루브르 박물관이 그녀의 자화상을 구입해 최초로 루브르에 입성한 중남미 작가가 됐다.

그 후 결국에는 디에고와의 관계가 악화돼 이혼했지만, 이런 결별과 배신과 상처와 절망은 프리다를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1940년 다시 부부가 됐고, 몇 년간은 그녀에게 가장 평온한 시기였다. 이때 시립미술대학 교수로 초빙됐고 그림에도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디에고의 아내가 아닌 화가 프리다 칼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에드워드 호퍼, 기찻길 옆 호텔, 캔버스에 오일, 102×79.4㎝, 1952년, 여성 모델은 조세핀, 마치 부부 초상화처럼 부부 사이의 긴장과 소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했던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남미 작가로는 최초로 루브르에 입성했다. 1938년.
(3)결혼 초기에 산앙헬에 지은 프리다와 디에고의 작업실, 각자의 공간에서 교각을 통해 드나들게 설계됐다. (4)함께 포즈를 취했지만 마치 동상이몽처럼 두 사람의 시선은 사뭇 다르다.
부인 조세핀의 창작 욕구 억누른 에드워드 호퍼

한국에서도 수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에드워드 호퍼(1882~1967년)와 그의 부인 조세핀 니비슨 호퍼(1883~1968년)의 삶은 프리다와 디에고의 예술적 삶에 비하면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녀는 “조세핀 없이는 호퍼도 없다”고 전해질 만큼 호퍼 예술 세계의 가장 큰 공로자로 알려져 있다. 안타까운 건 그녀가 그저 반려자, 모델, 매니저로서의 역할만 알려졌을 뿐, 결혼 전까지 호퍼 못지않게 촉망받는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뉴욕 아트스쿨 동창생인 호퍼와 조세핀은 졸업 후 한 모임에서 만나 연인이 된다. 당시 조세핀은 미국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그룹전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특히 수채화에 두각을 보였던 그녀는 호퍼에게 수채화를 그리도록 권유했으며, 자신에게 온 전시 요청에 호퍼의 그림도 걸릴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 했다. 조세핀의 소개로 브루클린 미술관에 출품된 호퍼의 수채화는 미술관 소장품으로 채택되며 미술계의 큰 호응을 얻는다. 두 사람은 이듬해인 1924년 40대 초반 나이에 결혼했고, 이때부터 예술가로서의 조세핀의 커리어는 막을 내린다. 조세핀은 호퍼의 아내이자 매니저 노릇을 충실히 해냈지만, 자발적으로 화가의 길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것은 호퍼의 가스라이팅이었다. 그는 조세핀이 그림을 그리면 ‘볼품없는 작품’이라며 혹평해서 꿈을 접게 만들었다.

호퍼는 아내가 얌전하고 정숙한 전통적인 주부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맸다. 정신적 학대는 물론 신체적으로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조세핀은 여느 가정폭력 피해자처럼 평생 이런 폭력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호퍼의 잦은 폭언과 폭력에 조세핀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호퍼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꼬집고, 할퀴었다. 남편에 대한 원망을 일기장에 토로하기도 했다. 이 전쟁 같은 관계는 호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아내의 창작 충동을 억누른 호퍼는 자신의 모델로 조세핀만을 고집했다.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금발 여성은 대부분 조세핀이다. 연기 공부를 했던 조세핀은 어떤 역할이라도 탁월하게 해내고자 노력했다. 호퍼가 미술사에 이름을 새기며 거장으로 예우받고 있을 때, 조세핀은 그의 작품 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늙어갔다.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46호 (2024.02.07~2024.02.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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