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들끓던 '돌창고'가 핫플 됐다…월드컵 초대작가도 찾은 사연
三多 제주, 저리 가라…이 섬은 “파면 돌이다”
그렇다고 돌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 명승 제15호인 ‘다랭이논(다랑이논 사투리)’은 45도의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 돌로 석축을 쌓아 만든 계단식 논이다.
제주처럼 집을 둘러싼 ‘돌담’, 해안에 돌을 쌓아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를 잡아두는 ‘석방렴’도 있다. ‘돌산’인 남해 금산(錦山)은 금강산을 축소한 듯한 아름다운 바위 경관 덕에 남해12경으로 꼽힌다.
이런 남해에서 최근 돌 때문에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게 있다. 남해 삼동면 시문마을 ‘돌창고’ 이야기다.
시문 돌창고는 한때 쓰임을 다하고 버려졌던 공간이다. 하지만 “당신이 남해에 심은 문화의 씨앗”이란 슬로건을 내건 문화 전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관광객은 물론 지역민에게 사랑받고 있다. 약 33평(109.07㎡)에 불과한 돌창고 전시장에 월평균 2000명이 찾는다.
‘남해 보호수 프로젝트’ 등 돌창고에서 기획한 전시에 최정화 작가도 참여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최 작가는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당시 수도 도하에 ‘Come Together’이란 특별 조형물을 설치한 국내 대표 설치 미술가다.
마을 얼굴→천덕꾸러기…쥐 들끓던 버려진 돌창고
시문마을은 차창 너머로 죽방멸치를 잡는 죽방렴이 보이는 남해 창선교(창선도→남해도 방면)에서 차로 약 5분 더 가면 나온다. 겨울엔 시금치, 봄엔 마늘을 심거나 논농사를 짓는 주민 70여명이 산다.
마을 입구에 시문 돌창고가 있다. ‘청돌(靑石)’로 불리는 남해 자연석인 청색 화강암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1967년 짓고, 57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견고해 보였다.
1973년 남해대교 개통 전, 뭍을 오가기 어려운 남해에서 귀중한 양곡(쌀)과 비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려면 창고가 튼튼해야 했다. 창고 벽을 망치로 깨고 보관품을 훔쳐 가는 도둑도 있었다.
당시 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단한 건축자재는 돌이었다. 시문마을 인근 영지마을 이장인 최창렬(69)씨는 “옛날 섬에 쎄멘(시멘트)이나 철근은 없는데, 널린 게 돌이니까. 그걸로 만들었다”며 “시문·영지 등 5개 부락 공동창고였다”고 했다.
당시 산에서 석공이 돌을 큐브형으로 깨주면, 마을 사람들은 한두 덩어리씩 지게에 지고 날라 돌창고를 지었다. 사각형으로 각진 벽면과 달리, 문은 부드러운 아치형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돌창고는 ‘마을의 얼굴’이다 보니, 다른 마을 것보다 ‘멋있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철근 콘크리트 건축자재가 보편화되고 편리한 조립식 창고가 나오면서 돌창고가 더는 필요하지 않게 됐다. 남해군 관계자는 “쥐가 들어오지. 창고인데 보관도 못 하지. 팔지도 못하는데 비용 때문에 철거도 못 하지. 사실상 천덕꾸러기였다”고 했다.
“불시착한 우주선 같았다”…외지 청년이 본 가능성
시문 돌창고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7월 당시 한 서른 살 청년이 돌창고를 사면서다. 지금의 ‘주식회사 돌창고(옛 헤테로토피아)’ 최승용(39) 대표다.
당시 최 대표는 서울 건국대 대학원 박사과정(문화컨텐트학)을 밟던 중이었다. 방학 때 고향인 경남 하동에 왔다가 남해에 사는 친구 연락을 받고 돌창고를 알게 됐다고 한다.
최 대표는 수풀에 덮여 방치된 돌창고를 보고 “불시착한 우주선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오래된 미래”에서 왔지만, 정작 주변에선 우주선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단 이유에서다.
최 대표는 “아치형 문은 균형·비례감 등 미적으로 우수하고 균열·붕괴할 위험 없이 견고했다. 특히 남해 농촌시대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등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었다”며 “이곳에서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최 대표는 어머니에게 결혼자금을 당겨 받아 4800만원에 돌창고를 샀다. 이후 그와 동료들은 ‘저장’ 대신 ‘전시’라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해 버려진 돌창고를 문화 공간으로 재생했다.
이런 작품 전시 공간을 기다렸다는 듯, 지역 안팎의 젊은 창작자들이 돌창고에 몰렸다. 2016년 7월 ‘정지비행’을 시작으로, 약 20차례 전시회가 열렸다.
돌창고에서 뭘 할 것인가…“시작은 개인적 결핍”
돌창고 운영은 그때그때 부족함을 채워가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문화 공간이란 생각도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최 대표의 ‘개인적 결핍’이 시작이었다.
경남 하동 출신인 최 대표는 원래 공부를 마치면 자연환경이 좋은 지역에 와 살려고 했다. “그런데 도시에서 누리던 문화생활도 여기서 즐기고 싶었다”면서 “여긴 그게 없으니 ‘내가 만들자’ 했고, 돌창고를 만난 게 아주 좋은 계기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돌창고 카페도 마찬가지였다. 돌창고 전시장에는 관람객과 대화할 공간이 없었다. 급한 대로 돌창고 바로 뒤에 있던 마늘·시금치 보관 창고를 빌려, 테이블 몇 개를 가져다 놓고 얘기를 나눴다. 이때 최 대표가 마실 것으로 급히 내놓은 음료는 ‘아침에 먹으라’며 하동에서 어머니가 보내준 미숫가루였다.
이후 최 대표가 사들여 카페로 재생한 이 마늘 창고는 관람객은 물론, 남녀노소 지역민이 소통하는 ‘사랑방’이 됐다. ‘어머니 미숫가루(실제 메뉴명)’는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가 됐다.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이파리빵(시금치)’와 ‘레몬유자에이드(유자)’, ‘가래떡 구이(햅쌀)’에도 뒤지지 않는 인기 메뉴다.
돌창고 스튜디오도 전시에서 나아가 ‘남해 보호수’, ‘남해 소리’ 등 지역 이야기를 모아 낸 출판, 지역 문화 기반시설(인프라)을 구축하는 기획도 하면서, 이를 위한 기획 사무실이 필요해 만들었다. 돌창고 카페 옆 옛 보건지소 건물을 빌려 재생했다.
돌창고를 재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 대표 등 돌창고 팀은 옛 미조항 제빙공장·냉동창고를 전시장·음악공연장·카페를 갖춘 ‘스페이스 미조’, 옛 남해각 휴게소를 기억의 예술관·여행자 안내센터로 되살렸다.
“다른 문화 공간이 많이 생기면 수익이 적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최 대표는 “‘돌창고가 망할 때는 남해에 돌창고만 우뚝 설 때’라고 종종 말한다”며 “작은 파이를 차지하려고 애쓰기보단 파이를 키워, 더 많은 사람이 오고 싶은 지역이 되어야 함께 살 수 있다”고 답했다.
지역 화가 꿈 찾아준 돌창고…“지역서도 매력적으로 산다”
주식회사 돌창고는 현재 전시장 입장료와 전시 작품 판매 수수료, 카페 식음료 판매, 기획과 출판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 최 대표 포함 7명의 인건비와 카페·전시장·스튜디오 운영비 등은 번다고 한다. 최저시급 기준, 1명 연봉이 약 2400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연간 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최 대표는 “8년 차에 접어든 돌창고 성과는 수익도 전시나 공연, 여러 프로젝트가 아니다”며 “지역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를 직원으로 고용해 오늘까지 함께 하고 있다는 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지역에서도 농·수산업뿐만 아닌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도시 못지않게 즐거운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단 게 돌창고가 추구하는 가치다.
이 때문에 최 대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품 전시도 2017년 기획한 ‘Summer Time(서머타임)’이다. 남해 미조 출신의 김서진 작가의 직업을 찾아준 첫 전시였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 없었다고 한다. 20살 때부터 혼자 크레파스로 그리기 시작, 5년 동안 그림을 멈춘 적이 없었다. 돌창고 개관 전시인 ‘정지비행’에서 김 작가를 만난 최 대표는 이후 그의 그림을 보고 전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김 작가 데뷔 무대가 된 서머타임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김 작가 그림이 무려 4점이나 팔렸다. 최 대표는 “그렇게 그 친구는 작가가 됐다”며 “그 전시는 돌창고가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한 것”이라고 했다.
남해=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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