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글 뒤엎었을 때... RM의 말에서 찾은 실마리
[박순우 기자]
책을 내고 싶어 안달한 적이 있다. 매일 글을 쓴 지 8개월쯤 된 무렵이었는데, 책 출간이 흔한 시대에 나만 책을 내지 못한 것 같다는 자만심과 조급증에 휩싸였다. 왜 책이어야 하는지, 책 한 권을 내고 나면 그 후에는 어떤 글을 쓸 건지, 아무 생각도 정리된 바가 없으면서 그저 책을 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동안 그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다 마음을 다 끄집어내 글로 적었다. 당장 부끄럽더라도 솔직하게 글로 마음을 옮기고 나면, 다시 중심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쓰면서 삶을 깊이 고찰하고 잘못된 방향을 수정하는 건 언제부턴가 나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숨기고 싶은 마음도 모조리 꺼내어 글로 정리하고 나면 그제야 응어리가 풀린다. 눈앞의 흐릿한 안개가 걷히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때도 그랬다. 한참 끙끙 대며 속앓이를 하다 결국 글을 쓴 뒤에야 방향을 잡았다. 글은 내 마음속 응어리가 단지 꿈인지, 지나친 욕심인지, 시기상조의 탐욕인지를 가려준다.
당시의 내 마음은 탐욕이었다. 빨리 작가가 되고 싶다는, 근사한 책 한 권을 세상에 내어놓고 싶다는, 내 선택과 삶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지나쳤다.
쓰면서 깨달은 건 중요한 건 계속 쓰는 일상이지, 책을 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책은 쓰다 보면 한 번씩 내게 되는 중간 결과물일 뿐, 쓰는 삶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이후에 나는 한 번 더 앙큼한 마음을 먹었다. 시커먼 속내는 왜 걷어내도 또 한 번씩 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쓰는 사람이자, 쓰려는 사람을 돕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앞선 나머지, 돕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글쓰기 시리즈'를 쓰자 결심한 것이다.
▲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 박순우 지음, 루아크 출판 |
ⓒ 루아크 |
덜컥 저지르지 않으면 생각으로만 머물 것 같아 나는 급하게 <오마이뉴스>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게 바로 '생애 첫 글쓰기' 시리즈다. 글을 고작 한 편 쓴 뒤부터 멘붕이 오기 시작했다. 앙큼한 마음을 먹었으니 온전히 글이 써질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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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나는 글을 쓰면서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가는데, 그 글을 쓰면서는 도무지 설레지 않았다. 시커먼 속내 때문이었다. 남들이 이미 다 한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글을 쓰려고 하니 설렐 리가 있나. 쓰는 사람도 신이 나지 않는 글을 뭐 하러 쓰느냐며 나는 쓰던 글을 다 뒤엎고 칩거에 들어갔다.
웅크린 채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글쓰기'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수백 권은 족히 나오겠지, 내 예상을 뒤엎고 검색된 책만 3천여 권이었다.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덜컥 일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이렇게 글쓰기 책이 많은데 나까지 뭐 하러 쓴다고 나섰을까. 후회해도 소용은 없다. 때는 늦었다. 연재 창은 이미 열렸고 나는 뭐라도 더 써야만 한다.
그때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많은 책들이 아직까지 말해주지 않은 건 무엇인가',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tvN예능 프로그램 <알쓸인잡>에서 BTS의 리더 RM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제가 에미넴이나 에픽하이의 타블로 형만큼 랩을 잘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나만의 모서리는 있다고 믿어요." 어쩌면 나는 그때 나만의 모서리를 찾으려 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모서리는 무엇일까,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결국 내 색깔과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듬뿍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자 고군분투하며 글을 향해 달려갔던 날들, '좋은 글'을 써보겠다며 '좋은 글'이 대체 무엇인가를 두고 고뇌했던 날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어떻게든 글 속에서 길을 찾으려 애를 쓰는 생생한 나의 이야기들. 그 속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건져내 다시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내 뼈와 살을 깎아 쓰는 심정으로 저질러 놓은 연재를 두 편쯤 더 써낸 어느 날,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글을 묶어 책으로 내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출판사 이름이 낯설어 '루아크' 세 글자를 검색해 보았다. 노동, 인권, 건축, 기후위기 등 주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펴낸 출판사였다. 이런 곳에서 내 글에 흥미를 보였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세상에 필요한 책을 묵묵히 내는 출판사라는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고민을 끝내고 답장을 보냈다. 출판사 대표님은 제목을 보고 단순히 글쓰기 기술에 대한 연재인 줄로만 알았는데, 읽어보니 누구나 주저하고 고민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메일을 주고받고 열흘쯤 뒤 제주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로부터 반년이 흐른 뒤에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는 내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글쓰기와 관련해 그럴싸한 조언이나 기술적인 이야기를 더할 생각은 없었다. 먼저 글을 써온 선배의 마음으로, 내가 글과 함께 뚫고 지나온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글이 어떻게 내게 지푸라기이자 버팀목, 동반자가 되었는지. 쓰는 일상이 어떻게 삶을 헤쳐나가는 무기가 되는지.
혼자 쓰는 글? 함께 쓰는 글!
글을 쓰는 시간은 홀로 싸우는 시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마지막 퇴고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걸. 쓰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던 사랑하는 얼굴들과,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 돕는 역할의 고뇌를 알려준 수많은 이름들, 그동안 나를 그리고 내 글을 믿고 읽어준 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다는 걸. 마지막 퇴고를 마친 뒤에야 절절히 깨달았다.
글만은 혼자 쓸 수 있는 거라 여겼는데, 그 글도 결국 사람이 쓰는 거라 그 속에는 나를 둘러싼 사람과 세상이 담길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아챈다. 덕분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책 출판을 두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지인들과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선뜻 책을 들여준 고마운 동네 서점들, 왜 내 첫 책이 '글쓰기'를 담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까지.
늘 내 글이 감동을 넘어 공명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왔는데, 살아있는 피드백을 받으며 공명을 넘어선 전율을 느낀다. 글 속으로 숨어들었던 나는 그렇게 다시 세상과 조우한다. 이런 나를 보며 당신도 더는 망설이지 말고 그저 쓰기를. 이 중간 결과물이 그런 당신에게 땔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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