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딸 대신 내는 소리... 10년 하니 이제 배짱이 생겼어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났던 날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함께 울었고, 분노했고, 행동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날 뒤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10년의 시간 동안 여전히 기억의 장소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도 긴 시간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소들을 가보고, 그곳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견뎌온 이야기들도 풀어냅니다. 이 이야기들이 세월호참사를 기억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기자말>
[희정]
말을 꺼내기 어렵다. 오늘따라 들고 간 가방은 노란 리본 하나 없이 밋밋하다. 뭐라도 면피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자주 잊고 살았다.
"많은 분이 그래요. 조심스러워들 하시는데,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러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서. 조심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그냥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최선을 다해서 말씀드리려고요."
안명미씨가 이야기를 연다. 2014년 4월 16일 딸 지성이 떠난 후, 그는 이런 배려를 자주 해왔을 테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오랜 시간을 보낸 지 10년. 지난해 12월, 그는 4.16합창단 단원으로 인터뷰 자리에 왔다.
"내가 무슨 노래를..."
▲ 연습 때도 목이 쉴 정도로 노래를 했다는 안명미씨. 지금은 이토록 애쓰는 일을 내려놓았다고 하지만, 애를 썼기에 노래로 알리고 싶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 안명미
"초반에 저는 회의에 좀 가거나 리본이나 만들러 가는 정도였는데, 남편은 대책위 활동을 열심히 했거든요.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합창단이 있는데 가볼래?'라고... 제가 오래전부터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노래할 마음이 없을 때라 '내가 무슨 노래를 해'라고 했죠. 별로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어요."
우울이 깊던 시기였다.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떠다니면서 걷는 느낌"이던 시기. 그런 때 노래라니.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꿔 합창단에 들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도와보자, 이런 마음을 먹었던 거죠. 처음엔 3쌍으로 시작했어요."
처음 모인 사람들의 마음은 다 비슷했다.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우리가 문화제를 열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분(문화활동가)들이 있잖아요. 그중 한 분이 노래가 오래 간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노래는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다. 그래서 합창단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집한 거죠."
6명이라는 작은 수로 공연을 시작했다. 첫 공연은 2014년 11월, 황지현 학생이 합동분향소로 오는 날이었다.
그는 날이 추웠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200일을 맞아 안산에서 가족 추모식이 열렸고, 197일 만에 시신이 수습된 황지현 학생의 영정이 합동분향소에 왔다. 그 자리에서 노래했다. 첫 공연은 무섭고, 떨리고, 슬펐다.
"합창단 안에서도 유가족이잖아요"
▲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들이 있다. 117차 수원매탄촛불에 함께한 4.16합창단. 이날도 많은 응원과 위로를 받았다.ⓒ 4.16합창단
합창단 초반에는 인원도 적고 연습량도 적어 사람들에게 우리 노래가 들리기나 할까, 걱정부터 앞섰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애를 썼어요. 연습할 때도 끝나고 나면 목이 쉴 정도로."
지금은 세월호 가족뿐 아니라 시민들까지 함께해 50여 명 규모의 합창단이 됐다. 매주 월요일 저녁이면 강당에 모여 연습을 하는데, 서울에서도 오고 부천에서도 온다. 9년째 계속되는 일이다. 안명미씨도 거의 빠지는 날 없이 참석했다. 그러다 지난, 2022년 합창단 활동을 쉬기로 했다.
"딱 1년만 쉬겠다고 했어요. 사실 그전부터 너무 지쳤는데, 코로나 때문에 말을 못 했던 거죠. 임원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을. 1년을 쉬고 왔는데,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가던지."
지난 9년간 합창단의 공연 횟수만 300회가 넘는다. 지칠만 하지만 그를 지치게 한 것은 잦은 일정이 아니었다.
"그전에는 의무감이 컸어요. 나는 유가족이니까. 합창단 안에서도 유가족이잖아요. 그러니까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빠지면 안 되고, 농땡이를 부려서는 안 되고. 누가 알아주건 아니건 그런 마음이 강했어요."
늘 어깨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나를 옥죈 거죠. 그게 나를 지치게 했던 것 같아요." 쉬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내면서 책무감을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돌아와 다시 노래를 하니, 합창이 뭔지 알겠더란다.
"합창이라는 게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 서로 튀지 않게 둥글게 화음을 내는 거더라고요. 옆 사람과 조화를 맞추면 그걸로 충분한 거. 합창단을 오랜 세월 했는데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목소리를 막 크게 내려고도 하지 말고, 너무 열심히도 말자. 내 자리를 지키는 걸로 충분하다. 지금은 묻어가듯 스며드는 느낌으로 노래해요."
노래를 좋아했으나 가수를 꿈꾸지 않았다. 안명미는 혼자 튀는 것보다 함께 부르기를 택하는 사람이었다. 주부로 살며 성가대 활동 말고는 '집 밖'을 잘 몰랐다고 했다. 외부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우리 지성이한테 맨날 그랬어요. '튀지 마'라고요. 아이가 좀 튀었거든요. 그래서 '튀면 사람들이 너 쳐다봐'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우리가 생활하던 대로 아이들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성이를 통해 많이 배웠어요. 저 아이는 남이 못 보는 걸 보는 아이구나. 남이 못 가진 거를 가진 아이인데, 다른 사람하고 똑같이 콩나물 키우듯이 키우려 했구나."
그런 딸이 떠나자 자신이 소리를 내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합창을 해도 예전처럼 부를 수 없었다. 한때는 이 노래가 제대로 전해질지를 염려하며 목청을 키우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자신을 다독이는 사람이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10년 세월 동안 깨우친 것은, 노래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고운 목소리로 음정을 정확하게 부르면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르죠. 노래라는 게 음을 달아서 말을 하는 거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우리의 메시지를 던진다는, 그러한 마음을 다해 불러요."
합창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는 말에서, 그의 인생이 전해야만 하는 메시지로 채워지는 과정을 본다.
4.16합창단을 청중으로 만날 때가 있다. 이들이 무대에 서면, 눈을 어디에 둘지 몰라 했다. 저이들 속에 있을 유가족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돌이켜보니 나는 이들의 청자가 아니었다.
"메시지를 던지면 신기한 게 관중들이 그걸 받아요. 우리가 지금 부르는 이 노래가 저 사람들의 마음과 만나는구나, 느껴질 때가 있어요. 최근에 수원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날 진짜 추웠거든요. 그런데도 막 느껴지는 거예요. 관중이 우리의 마음을 맞이하더라고요. 서로 고양되어서 앵콜까지 나오고. 우리 마음을 알아주니 고맙죠."
그날 공연을 하고 감기에 걸렸다. 한겨울 한기를 받아들이며 소리를 낸다. 전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릴 때, 이들과 눈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고 응답했다. 합창은 조화를 이루고 스며 들어가는 일이라 들었는데, 그건 노래를 부르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듣는 이들 또한 스며 들어갔다.
합창단 동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같이 지내면요, 우리의 마음을 알아가더라고요. 지금 세월호 진상규명도 안 되고 4.16생명안전공원도 착공되지 않은 상태라, 그런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들이 그냥 스며든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음들이 닮아가더라고요."
세월호 합창단원들의 이야기를 모아낸 책의 제목처럼 '노래를 불러서 네가 온다면...' 그 마음을 듣는 이도, 노래하는 이도 그 바람을 함께한다.
"서쪽 하늘에 있나. 어느 별이 되었을까. 내 어깨에 내려앉은 이 별빛 네 손길인가. ... 그날부터 비로소 그날부터 잊을 수 없는 그 웃음, 어둔 바다 깊은 하늘에 지울 수 없는 눈망울." ('어느 별이 되었을까', 작사 이건범·작곡 이현관)
믿는 구석
▲ 4.16생명안전공원에서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예배가 열린다. 이때 단상에 안명미씨가 만든 꽃바구니가 올라간다.ⓒ 안명미
2014년 4월 16일 그날로부터 무엇이 바뀌었나. 그 질문을 안명미씨에게 돌렸다. "뭔가 배짱이 생겼달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진상규명 문제도, 합창단 공연도 그랬다.
"처음에는 떨리고 그랬는데, 배짱이 생겼어요. 못 해도 돼. 그런 마음이 생겨요. 가사가 잘 안 외워지면 더 열심히 듣고 외우면 되지. 조금 내려놨달까.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잘할 테니까. 합창이잖아요. 여러 사람이 하니까."
믿는 구석이 생긴 걸까.
"진실도 어느 날엔가 밝혀지겠지. 그런 마음을 조금씩 먹어요."
참사가 터진 직후에는 단식을 하고 행진을 해도 어디로 가는 줄 몰랐다. 게다가 충격을 받아 몸을 더 바삐 움직이는 건 배우자 쪽이었다. 그의 남편 문종택씨는 세월호의 진실을 기록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도 세월호 유가족 방송인 '4.16TV'를 운영하고 있다.
"남편이 밖에 있으니까,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옆에서 활동을 돕기도 했는데,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집을 지켰어요. 우리 집이 애가 다섯이라, 저녁이면 왁자지껄한 집이었는데 둘째 결혼하고, 다른 아이는 기숙사 가고, 지성이는 없고. 빈집이 되더라고요. 우울감에 빠져서 너무 힘들었어요."
집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렀는데, 빈집이었다. 안명미씨는 그때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언지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어요."
우선 운전을 배웠다. 자신을 오며 가며 태워주던 남편에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세월호 가족에게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찾아 듣고 배웠다. 꽃꽂이를 배웠고, 그림을 그렸고, 심리상담을 받으러 갔다.
"누가 나를 대신해 내 마음을 알아줄 순 없다, 싶더라고요. 내 마음은 스스로 찾아야겠다. 상담도 직접 찾아갔어요. 계속 갔어요. 그렇게 나를 찾아가기 시작했죠."
그렇게 수년이 흘러 그는 함께 그림을 배운 세월호 가족들과 전시를 열었다. 지성씨의 소지품이 화폭에 담겼다. 그가 만든 꽃바구니는 매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예배 단상에 올라간다.
"남편은 처음에는 자기가 너무 바빠 나를 쳐다볼 수 없었지만, 요새는 좀 보이나 봐요. 자꾸 (사무실로) 놀러 와. 그러면 저는 나 바빠라고 하죠."
그렇게 달라졌다. 그는 "내가 해온 일들로 내가 구성돼 온 거예요"라고 부연했다. 그러니까 그의 믿는 구석은 자기 자신이었다.
"저는 우리 지성이 보내고 난 뒤에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많이 나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했고, 내가 어딘가에 쓰임 받기를 원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나 자신을 찾아와야 해요. 나를 깨워야 하고 움츠려 있던 나를 깨야 해요. 지금껏 그런 시간을 보내온 것 같아요."
지성씨는 반짝거리던 딸이라 했는데, 그 자신이 딸을 닮아가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 1반 문지성
▲ 전시를 연 날, 안명미씨는 딸 지성씨의 소지품을 그린 작품 앞에 섰다.ⓒ 안명미
지성씨가 416단원고약전(<짧은, 그리고 영원한>, 2016)에 담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원고 약전이란,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의 짧은 생을 복원한 책이다. 100여 명의 작가가 모여 200여 명의 학생과 교사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는 딸의 반짝이던 생애가 책에 담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땐 너무 많은 판단을 해야 했고, 그때 놓친 선택 중 하나가 약전이었다.
"그 뒤로 뭐든 빠지지 않고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인터뷰를 그가 외면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딸 지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물었다. 글 마지막에 지성씨를 소개하겠다고 약속했다.
"너무 예쁜 아이였어요. 그림이 실물을 표현해내지 못하더라고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느낌의 아이였어요. 앞만 아니라 옆도 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못 보는 면을 볼 수 있는 아이구나. 그 애로 인해서 많이 웃었어요.
옷도 남들이 안 입는 거. 양말도 신발도 초록색으로 신고 간다든지. 남들은 소화 못 해도 나는 할 수 있어. 자신감이 넘쳤어요. 친구들이 남기고 간 편지를 보니까, 친구들이 너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니? 할 정도로. 친구들 카운슬러도 많이 해줬더라고요. 예뻐서 연기자 해보자는 사람도 많았어요. 길거리 캐스팅도 되고. 그런데 자기는 그런 거 안 할 거라고.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 패션 디자이너랑 아나운서도 하고 싶다고 했어요.
자신감이 넘쳤는데. 못 해준 게 미안하죠. 우리가 식구가 많고 살림이 넉넉지 못해서 많이 밀어주질 못했어요. 우리 집 보물 같은 아이였는데. 반짝거려서 너무 자랑하고 싶었는데, 아이가 교만해지고 저밖에 모를까 봐 칭찬도 잘 안 했거든요. 그게 무슨 미덕이라고... 애가 가고 나니까 엄마가 우리 딸 자랑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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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기록노동자로 <베테랑의 몸>, <일할 자격>, <노동자, 쓰러지다>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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