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고문하고... 가족이 당한 일의 대가가 2700만 원

성낙선 2024. 2. 1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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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여행] 다시 5.18광주민주화운동 현장을 찾아서... 아직 못다 푼 숙제들

[성낙선 기자]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시물. 거리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 계엄군들.
ⓒ 성낙선
광주광역시로 여행을 떠나는 날 아침, 어디선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 들린다. 5.18 당시 현장을 찾아갈 생각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어디서 환청이 들리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머리 속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구나 하고. 그런데 그 노래는 근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만 해도, 최루탄 매운 연기로 가득한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경찰에 체포돼서 유치장으로 끌려갈 수 있었다. 그런 '불온한' 노래가 이제는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시위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는 '친숙한' 노래가 됐다.
 
 전일빌딩245에서 내려다본 옛 전남도청.
ⓒ 성낙선
세월이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심지어 외국의 시위 현장에서도 불리고 있다. 홍콩에서, 미얀마에서 반정부 시위에 나선 대규모 군중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이 노래가 품고 있는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그만큼 '위험한' 노래다. 결의로 가득 차 있는 가사가 장엄하게 흐른다. "세월이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날 아침부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듣고 있으려니, 몸은 이미 광주로 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전일빌딩245 3층. 1980년 5월 27일 새벽, 당시 전일빌딩을 점령한 계엄군이 YWCA에 있던 시민군과 총격전을 벌인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
ⓒ 성낙선
 
한 가족을 처참히 짓밟은 대가가 2700만 원

님을 위한 행진곡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다.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위험한 노래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노래가 1980년 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체를 매우 함축적으로 담고 있어서다. 1980년대는 소문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소문의 실체는 언젠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쓴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 광주 시민들이 죽어가면서 외친 말들이 결국 현실이 되고 있다. 독재정권이 유언비어라고 매도했던 소문들은 모두 사실이 되었다.  

그 사이 무려 40년이 넘는,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진실은 상당 부분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역시 그 노랫말대로 되고 있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광주 시민들이 입은 피해를 회복하는 일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 당시 주먹밥을 담았던 양은함지박. 시민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주먹밥은 광주 공동체를 상징하는 음식이 됐다.
ⓒ 성낙선
 
진실을 대면하는 게 여전히 쉽지 않다. 지난 1월 말, 광주에서 한 가지 가슴 아픈 재판이 열렸다. 5.18 당시 왼쪽 가슴이 잘려 나가고 골반부에 여러 발의 총탄으로 관통상을 입은 채 숨진 한 여고생에 관한 재판이다. 법원은 여고생의 가족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며, 가족에게 '27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 판결이 또 한 번 땅을 치게 만든다. 국가가 한 가족을 처참하게 짓밟은 대가가 겨우 2700만 원이다. 그 돈은 '윤석열 검사' 등 검사들이 밥값과 술값으로 쓴 수억 원의 공금과 비교해도 극히 적은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여고생의 처참한 죽음은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남아 있어야 했다. 그 소문이 사실이 되기까지, 가족들이 겪은 일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고생의 남동생들 중 한 명은 계엄군에게 고문을 당하고, 다른 한 명은 허벅지에 대검이 찔리는 부상을 입는 등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월 20일 밤 공수부대에 학살된 시신을 옮기던 손수레 모형. 당시 언론에는 이런 사실이 보도가 되지 않아 시민들이 직접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야 했다.
ⓒ 성낙선
  
딸이 처참한 주검으로 돌아온 걸 보게 된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1년 뒤에 급하게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는 반신불수가 돼 6년 뒤 남편과 딸의 뒤를 따른다. 살아남은 남동생들은 평생 곤궁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 가족에게 2700만 원 배상 판결을 내린 법원의 결정은 그해 5월에 일어난 사건의 실체가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할 뿐이다.
왜 이런 일들이 계속될까? 살아서 그때 일들을 기억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기억해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 돌아온다. 지금도 진실을 거짓인 양, 그리고 거짓을 사실인 양 호도하는 자들이 기승을 부린다. 이럴 때 광주를 기억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는 생각이다. 2024년 겨울, '산 자'가 되어서 1980년 봄에 님들이 '행진'한 길을 따라가 본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시물 일부.
ⓒ 성낙선
5.18 광주시민의 구심점이었던 옛 전남도청

옛 전남도청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장소다. 5.18 당시 도청에 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의 본부가 있었다.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으로부터 결사적으로 지켜내려고 했던 최후의 항쟁지였다. 이곳에서 다수의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다. 도청 앞 5.18민주광장에서는 항쟁 기간 내내 대규모 군중 시위가 열렸다. 계엄군에 의해 고립된 광주 시민들을 하나로 만드는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현재, 옛 전남도청 앞은 높은 가림막이 세워진 채 복원 공사 중이다. 복원 공사 착공식이 지난해 10월 말 5.18민주광장에서 열렸다. 그 후로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가림막 위에 '이곳은 5.18민주화운동 최후의 항쟁지 옛 전남도청입니다. 오래 기다리신 만큼 제대로 복원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광주에 와서 옛 전남도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일빌딩245 카페에서 내려다본 옛 전남도청, 5.18민주광장.
ⓒ 성낙선
 
옛 전남도청은 한동안 복원 여부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옛 전남도청 뒤쪽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건립하면서다. 그 문화전당을 짓는 과정에서 옛날 건물 일부가 철거되고 변형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광주 시민들이 항의가 빗발쳤다. 정부는 결국 옛 전남도청 본관을 비롯해 도청별관, 도청회의실, 경찰국 본관, 경찰국 민원실, 상무관 등의 건물을 모두 1980년 5월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복원 후에는 옛 전남도청을 5.18을 기억하는 대표 공간으로 되살린다는 계획이다. 복원을 진행하는 기간은 2025년까지로 설정돼 있다. 실제 개관 시점은 2025년 말이나, 2026년 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전까지는 옛날 전남도청을 찾아가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옛 전남도청은 물론이고 당시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안치했던 상무관 건물 등은 여전히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5.18민주광장에서 바라본 전일빌딩245와 5.18시계탑. 5.18시계탑에서는 매일 오후 5시 18분에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 성낙선
 
 전일빌딩245 10층 전시장. 빌딩에 헬기 사격이 퍼부어지는 장면을 묘사한 전시물.
ⓒ 성낙선
 
전일빌딩245에 남아 있는 무수한 탄흔들

전일빌딩245은 도청에서 5.18민주광장 너머로 빤히 바라다보이는 건물이다. 10층 높이로, 1980년에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지금은 이 건물이 옛 전남도청 대신 5.18을 대변하는 건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을 향해 헬기 사격이 있었던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물이다. 건물 가까이 다가가면, 벽에 노란 점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게 눈에 띈다.

그 노란 점들이 군이 헬기 사격을 퍼부었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언한다. 전일빌딩245에는 헬기 사격으로 인한 탄흔이 현재 모두 245개가 남아 있다. 전일빌딩245이라는 명칭은 245번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245가 이 건물에 박힌 탄흔 수와도 일치해 묘한 상징성을 갖게 됐다. 빌딩 내부로 들어가면 탄흔들이 외부 벽뿐만 아니라, 실내 바닥과 기둥에도 박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탄흔들을 보면, 당시 헬기 사격이 얼마나 맹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전일빌딩245 10층 기둥에 남은 총탄 자국. 왼쪽 벽에 남은 탄흔을 오른쪽 거울에 비춰서 보여주고 있다.
ⓒ 성낙선
 
 전일빌딩245 전시장, 광주 시가지 위에 헬기가 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전시물.
ⓒ 성낙선
 
헬기 사격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증거하는 문서도 남아 있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죽을 때까지 헬기 사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전두환은 끝내 역사의 심판을 받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재판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헬기 사격과 관련해, 전일빌당245에서는 지금도 계속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다. 더욱더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서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아직도 헬기 사격을 부정하는 목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이 5.18 관련 소문을 모두 유언비어로 매도해 온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전일빌딩245가 남아 있는 한, 그 사실을 계속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일빌딩245에서는 헬기 사격 탄흔 이외에도 5.18과 관련해 다양한 내용의 역사적 사실들을 접할 수 있다. 광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은 꼭 들려봐야 할 장소다. 이곳에서, 내가 알고 있는 광주가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전일빌딩245는 2017년 5.18사적지 제28호로 지정됐다. 역사 교육 현장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던 건 5.18 40주년이 되던 해인, 2020년 5월이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검열을 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김준태 시인이 쓴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에 삭제 표시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 성낙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가득 채운 기억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전일빌딩245에서 금남로를 따라서 조금 더 올라가면 나온다. 이 기록관은 광주광역시가 2015년 5월, '인류의 유산인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수집, 영구 보존하고 세계인과 공유하기 위해 설립'했다. 인류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록물로 인정받아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기록관에는 5.18과 연관이 있는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정부 기관과 군사 법정의 자료, 언론인들의 취재수첩 등 문서 4200여 건과 3700여 컷의 사진필름 등의 기록물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연구도 함께 이뤄진다. 이곳은 기록물이 매우 방대해 세세히 살펴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오는 3월 10일까지 '1980년 5월 단상'이라는 제목으로 5.18민주화운동 제43주년 기념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이 기획전에는 화가 최재영이 그린 그림과 그의 부친인 최병오씨가 찍은 사진 137컷이 전시 중이다. 그의 사진에는 5월 15일 도청 앞 시위군중들의 모습과 5월 21일 전남대병원 교차로에서 불에 탄 차량 등이 담겼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광주 시민 최병오씨가 5.18 당시 현장을 기록한 사진들 일부. 이 사진들은 최병오씨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아들 최재영 화가에 의해서 43년만에 빛을 보게 됐다.
ⓒ 성낙선
 
이 사진들은 최병오씨가 1980년 5월에 찍은 것으로, 최재영 화가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화가 최재영은 '5월의 기억'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간의 회화작품으로 만들어 아버지가 남긴 사진과 함께 전시했다. 그 엄혹했던 시절에 그 많은 사진들을 찍어서 4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의 아들조차 그 사실을 모르게 간직해 왔던 사실이 놀랍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이 남아 있다. 이 노래는 1982년에, 고 백기완 선생이 작사를 하고 당시 전남대생이었던 김종률씨가 작곡을 했다. 5.18 당시 시민군대변인이었던 윤상원씨와 노동야학강사였던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을 위해 만든 곡이다.

5.18민주화광장 한 켠에 있는 5.18시계탑에서는 지금도 매일 오후 5시 18분이 되면,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기억의 힘은 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니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도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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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을 소재로 한 영화'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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