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바꾼 삶... "송일국님, 같이 활 한번 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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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얼마 전 대학원 사람들과 가진 술자리에서였다. 사학과 학생들 아니랄까 봐, 각자 돌아가며 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은 계기를 밝히는 시간을 가졌다.
"어릴 때 아버지가 보던 <불멸의 이순신>을 따라 보다가...", "저도 <불멸의 이순신>을 보고..."
2004~2005년 장안의 화제였던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104부작)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드라마 한 편이 이리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다니. 곧이어 내 차례가 왔다.
"<불멸의 이순신>이 여러 사람의 미래를 바꿨네요. 실은 저도..."
나의 대답에 다들 빵 터졌다.
농담이 아니라 역사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중학생 때 봤던 <불멸의 이순신> 때문이었다. <불멸의 이순신>은 내게 사극이 얼마나 재밌고 감동적인 드라마인지를 알려줬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에 큰 감동을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흠결 하나 없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겁 많고 나약했던 소년 이순신이 온갖 역경을 극복해가며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묘사가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물론 이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드라마적 허구에 가깝지만 말이다).
당시의 나 역시 현실에서는 겁 많고 소심한 소년이었기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동경이 자연스레 역사 속 영웅들에 대한 동경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렇게 우리 역사 속의 위인들을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중학생 때 처음 품었다.
▲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中 활을 쏘는 이순신(김명민)의 모습 |
ⓒ KBS |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활을 비겁한 무기라고 생각했다. 대신 적과 가까이 붙어서 멋지게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칼(검)이야말로 진정한 무기라고 여겼었다. 멀리서 화살로 적을 쏘아 맞히는 활은, 당시 내 어린 눈에 상당히 비겁해 보였던 모양이다. 게임 캐릭터를 설정할 때도 활을 든 궁수 캐릭터는 쳐다도 보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러나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활쏘기에 대한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활을 쏘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설렘을 느낀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이순신의 활은 단순한 살상 무기를 넘어, 청년 이순신의 성장을 이끌어 낸 도구이자 전란으로 고단해진 심신을 가다듬는 심신 수양의 도구로 묘사됐다. 자연스레 '영웅의 무기'인 활에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2006~2007년 MBC에서 방영된 퓨전사극 <주몽>을 보면서 활쏘기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다. 주몽 역을 맡았던 송일국 배우는 신궁(神弓)으로 유명했던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국궁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드라마에서 보여준 활쏘기 실력은 수준급이었는데, 눈을 감고도 백발백중하는 드라마적 연출까지 합쳐지니, 주몽이 활을 쏘는 장면만 나오면 나는 심장이 다 쿵쾅거릴 정도였다.
▲ MBC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 역을 맡은 배우 송일국이 활을 쏘는 모습 |
ⓒ MBC |
활 쏘는 순간만큼은 나도 영웅이 된다
사극 속 영웅들에 대한 동경. 이것이 내가 활쏘기에 관심 갖고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다. 건강? 명상? 자기수양? 그런 것들은 내게 있어 모두 부차적인 요소들일 뿐이다.
최근에는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면서 '고려판 이순신' 양규(지승현)의 활약에 어린 시절 느꼈던 설렘과 흥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양규 역을 맡은 지승현 배우 역시 오랜 시간 국궁을 수련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안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활시위를 걸고, 전통적인 온깍지 사법(활을 쏠 때 뒷손을 힘차게 뒤로 뻗는 동작)으로 시원시원하게 활을 쏘는 등 수준 높은 전통활쏘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반해버린 나는 요즘 활터에 갈 때마다 마치 양규에 빙의라도 된 마냥, 과녁을 거란군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활을 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활터 가는 길이 늘 설렌다. 활을 쏘는 그 순간만큼은 잠시나마 영웅을 꿈꾸던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이순신이 되기도 하고 주몽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활을 한참 쏘고 나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물리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샘솟는다. 잠시 활을 들고 전장을 누비고 돌아오면, 지금 내가 일상에서 하고 있는 걱정들 대개가 먼지처럼 한없이 가볍고 쓸데없이 느껴지기도 한다.
▲ 활터에 세워져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 비석 (서울 공항정) |
ⓒ 김경준 |
이제 내게 있어 활쏘기는 소년 시절의 로망을 넘어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현실의 역경에 맞서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생 살이'에 지친, 그래서 살아갈 용기를 잃은 이들에게 활쏘기를 적극 권하고 싶다. 당신도 활을 쥐는 순간 영웅이 될 테니.
▲ 2022년 1월 오마이뉴스 기사가 나간 직후 기자의 SNS에 송일국 배우가 달아준 댓글 |
ⓒ 김경준 |
애석하게도 아직 그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다. 어릴 적 영웅인 주몽(송일국)과 함께 활을 쏘는 것은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이 자리를 빌어 송일국 배우에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초대 편지를 띄워본다.
"송 배우님, 언제 저희 활터로 놀러오셔서 같이 활 한 번 내시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김경준 기자는 서울시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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