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인가, 행동인가? 클레어 키건의 실존적 질문
[김종성 기자]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Barow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p. 11)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로 시작하는 저 첫 문장에 클레어 키건은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암울한 시대의 분위기와 무거운 공기로 가득한 공간을 녹여냈다. 물론 '벌거 벗겼다' '가라앉아' '북술한 끈' '흑맥주' '몸이 불었다'는 묘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하다.
▲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
ⓒ 다산책방 |
그러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클레어 키건의 말마따나, "처음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도입 부분에서 어떤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야기를 다 읽고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우리는 흐릿했던 이미지를 잡아챌 수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1985년 겨울, 아일랜드는 실업과 빈곤에 허덕인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한 소도시 뉴로스는 을씨년스럽다. 주인공 '빌 펄롱'은 석탄 상인으로 부유하진 않아도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는 소시민이다. 빈곤하게 태어난 펄롱은 일찍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됐지만, 부유했던 친절한 어른 '미시즈 펄슨'의 선의로 번듯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펄롱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가족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고, 다섯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낼 경제적 능력이 있음에 안도한다. 또, 따뜻한 침대에 누워 다음 날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게 특권이라는 사실을 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살아간다. 그점에서 특별한 인물이다.
'미시즈 펄슨이 없었다면..' 펄롱은 그 가정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겸허함을 놓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이 누리는 안온한 일상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놀라운 자기객관화이다. 한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 많은 부분에 '운'이 개입한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태도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간 펄롱은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맨발의 소녀를 본 펄롱은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인 사건의 정황을 눈치챈다. 그는 고민에 빠진다. 침묵하면 지금의 안락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으리라. 반대로 행동을 취하면 마을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수녀원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p. 120-121)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명료한 언어로 직조되어 있다. 짧지만, 섬세하고 정교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고 썼고, 은유는 "긴 시", "시적인 순간"이라 했는데, 정말이지 불필요한 문장이나 단어가 없어 놀랍기만 하다.
영국의 문화평론가 베리 피어스는 "십여 년 만에 마침내 나온 클레어 키건의 신작이 고작 100여 쪽에 불과한 데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길. 키건은 단어 하나 낭비하지 않는 작가니까"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더할나위 없이 적확한 표현이다. 그의 글에는 불필요한 대화도, 너저분한 묘사와 설명도 없다.
작가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클레어 키건은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소설의 모티프로 삼았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했던 시설인데, 죄 없는 수많은 여성들을 감금한 채 폭행, 성폭력, 정서적 학대를 저질렀다. 무려 70년에 걸친 잔혹한 인권 유린에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클레어 키건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이 사건을 녹여냈지만, 단순한 고발에 머무르지 않는다(아일랜드 정부가 2013년에나 사과문을 발표했다는 점을 꼬집기는 한다). 클레어 키건은 펄롱이라는 인물을 창조해 그 개인의 내면을 추적한다. 공동체 내의 추악한 비밀의 맞닥뜨린 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삶의 본질을 이야기 한다.
자연스레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펄롱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클레어 키건은 자신의 답을 제시한다. 선택의 순간,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겠으나, 그럼에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가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 비밀을 외면했을 때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마음의 빚은 영원한 최악으로 남으리라.
1.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22년 오웰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2. 킬리언 머피 주연의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3. 첫 문단의 묘사는 물에 빠져 죽은 시신의 암시한다.
4. 이 소설은 두 번, 세 번 읽을수록 더 좋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너의 길을 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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