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단 몇 명인 '간판 없는 슈퍼'가 계속 문 여는 사연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 군북면 감로골 '감로상회' 김영복·염광자 부부 |
ⓒ 월간 옥이네 |
충북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감로골 마을 진입로 어귀, 이곳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간판 없는 슈퍼'가 한 곳 있다. 건물 앞쪽의 쉼터 의자와 건물 한쪽에 달린 담배 간판이 슈퍼로서 이곳의 정체성을 일러주는 듯한데... 가판대 위에는 과자류, 냉장시설에 음료가 가지런히 놓인 것을 보면 생명이 남아있는 슈퍼다. 1972년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 감로골서 슈퍼를 운영해온 김영복(85)·염광자(82)씨 부부를 만났다.
계란 한판 사려면 2시간 걷던 시절
김영복씨가 처음 이곳에 슈퍼를 연 것은 1972년. 아직 도로가 포장되지 않고, 이렇다 할 대중교통도 없던 시대였다. 당시 70여 호 200여 명이 거주했던 감로골에서 주민들은 계란이라도 한 판 사려면 옥천읍까지 2시간, 대전역까지 3시간 걸려 걸어가야 했다. 버스를 타려 해도 국도변까지 30분은 족히 걸어야 했으니,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군대 생활 마치고 고향 돌아와 보니 슈퍼 하나 열면 잘되겠다 싶었지. 주택 일부를 가게 공간으로 꾸며서 슈퍼 문을 열었어."
감로골에서 태어나 증약초등학교, 대전역 구내에 있던 대전 덕소철도학교(폐교된 계룡중학교)를 졸업한 뒤, 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영복씨다. 한국전쟁 직후 대전역 건물 일부를 활용해 문을 연 덕소철도학교는 고등부까지 졸업하면 철도국에 취업이 가능하도록 한 사립학교였지만, 가정 형편상 고등부까지 졸업하기란 어려웠다. 그는 대전에 위치한 중학교까지 걸어다니곤 했는데, 등굣길 풍경이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한국전쟁 직후라 도로에 군용차들이 많이 다녔어. 학교 갈 때면 군인들한테 부탁해서 대전까지 태워달라고 하곤 했지. 걸어가면 너무 힘들고 오래 걸리니까."
졸업 후 군 생활을 하며 지금의 아내를 만난 뒤, 1969년 베트남전쟁에 십자성부대(제100군수사령부)로 파병, 1970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서 부사관 중사로 제대한 뒤 살아갈 방법을 찾던 그에게, 이러한 마을 교통 환경은 하나의 기회로 다가왔다.
"근처에도 마을이 있잖아. 비야리에는 30호, 항곡리엔 40호, 증약리에 150호가 살았지. 우리 마을이 다른 마을 사람들도 옥천읍이나 대전 갈 때 지나는 길목이거든. 증약리에 백번상회랑 또 다른 간판 없는 슈퍼(현재 폐업)가 하나 있었지만 감로골에는 없으니까... 해볼 만하겠다 생각했지."
지금과는 달리 처음에는 목조 슬레이트 건물 형태였다. 1978년 정부에서 주택개량사업을 한 이후로 지금의 형상으로 바뀌었는데 그의 예상대로 슈퍼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계란, 과자류, 음료, 주류 외에도 양초나 풍선, 어린이 놀잇감과 같은 잡화도 이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아내 염광자씨와 번갈아 옥천읍 도매상점인 조흥상회(현재 폐업)에서 물건을 가져다 판매했다. 막걸리도 가판대에서 빠지지 않았다.
"막걸리는 군북양조장에서 매일 배달원이 자전거 타고 증약막걸리를 배달해주었지. 그때는 주전자에다 막걸리 넣어서 배달했어.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아이스께끼'(아이스바)는 못 팔았지. 대신 아이스께끼 장수가 따로 있어서 마을에 종종 오곤 했어."
증약막걸리는 비교적 최근까지 차로 배달을 해줘 판매했지만, 2018년부터는 발길이 끊겼다고. 마을을 떠들썩하게 하던 아이스께끼 장수도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 충북 옥천 군북면 감로골 '감로상회' |
ⓒ 월간 옥이네 |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현금을 지닌 사람이 드물었기에 손님 대부분이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가 이름을 장부에 적어두곤 했다. 1년에 두 번, 추석과 명절은 그동안 밀린 외상값을 받는 날이었다. 모두 얼굴을 아는 마을 사람들이기에 외상값을 갚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지만, 이러한 수금 방식은 그에게 큰 고민이었다고.
"아휴... 다 외상이었으니 힘들었지. 다들 없는 형편인 것 아니까 당장 돈이 없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장부에 이름 적어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받았지, 뭐(웃음)."
운영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고 자다가도 손님이 문 두드리면 일어나 물건을 팔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참 고생이었다"는 부부다.
"자다 깨면 피곤해도 손님이 찾는데, 어떻게 해요. 잠깐 일어나서 물건 내어주고 그랬지. 지나는 길목이어서 평소에도 쉬었다 가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가끔 밤중에 소란스러운 사람들이 들르면 힘들었지." (염광자씨)
도로 공사와 함께 변한 풍경
두 사람은 1970년대가 슈퍼의 전성기였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엉덩이 붙일 틈 없이" 바쁘게 물건을 내어주고 또 도매점에서 물건을 받아오던 시기였다. 부부는 그렇게 슈퍼를 운영하며 또 농사를 지으며 3남매를 길러냈다.
"슈퍼는 한때 성행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점점 힘들어졌어. 집 근처에 900평 배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꾸렸지. 농사지어서 대전 공판장에 내다 팔고 그러다 10년 전쯤 시세가 안 맞아서 배나무를 베어버렸네."
슈퍼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마을 도로 사정이 개선되면서부터였다. 1980년대 좁고 비포장이던 마을 도로가 확장·포장되기 시작한 것. 이전보다 쉽게 버스를 타고 옥천읍에 나가고 자가용이 생기면서 더 이상 동네 슈퍼에서 무언가를 구매하는 일이 적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옆에 따로 있던 담배 가게를 인수하기도 했는데, 담배 가게 주인이 연로한 탓이었다.
"당시 담배 가게를 70대 어르신이 운영하셨는데, 가게를 비우는 날이 많아지면서 다른 주민들이 '슈퍼에서 담배를 팔았으면 좋겠다'한 거지요. 그렇게 인수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 충북 옥천 군북면 감로골 '감로상회' 내부 |
ⓒ 월간 옥이네 |
이제 이곳을 찾는 손님은 담배를 찾는 마을 어르신과 여름철 시원한 음료를 찾는 주민들 몇 사람 뿐,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부부는 이곳을 찾는 이들, 또 찾아올 이들을 떠올리며 가지런히 물건을 세우고 또 정돈한다.
"간판은 없어도, 기억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래도 슈퍼인데 담배만 두기는 그렇잖아. 문 여는 날까지는 가판대를 잘 정돈해야지. 자식들도 취미 삼아 쉬엄쉬엄 운영하시라고 이야기하고. 새해 소망? 더 바랄 것은 없고 건강하면 그만이야. 자식들한테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라고 이야기하고 싶네."
월간옥이네 통권 79호(2024년 1월호)
글·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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