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위성정당의 실체... '30만 학살 음모'를 아십니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2. 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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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성근

[김종성 기자]

대의당(大義黨)이라는 일본제국주의 집권세력의 위성정당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창간한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의 1945년 6월 23일 자 2면 중간에 이렇게 보도된 정당이다.  

"국가에 대하여 일개 병졸이 되고 동포에 대하여 일개 충복이 되기를 기약하고 대의를 따라 죽을 굳은 단결을 하고 황국의 위기를 돌려 신기(神機)로 만드는 수사분투(殊死奮鬪)를 서약해 대의당을 결성하며, 이것이 발회식을 24일 오후 1시부터 부민관 대강당에서 거행한다."

해방이 두 달도 남지 않은 6월 24일 결성된 이 당은 이처럼 일본 국가와 지배세력의 "일개 병졸"을 자처했다. 한중 항일군과 미영 연합군의 압박으로 '황국'이 처한 위기를 신의 기회로 바꾸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분투하는 병졸의 정당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동포들에 대해서도 충복이 되겠다고 서약했지만, 이들의 행동과 모순된다. 이들은 한국인들을 강제징병·위안부·강제징용으로 동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동포들의 충복이 되겠다는 것은 사탕발림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충성을 하고 그로부터 금전적 이익도 얻고 있었으니, "국가에 대하여 일개 병졸"이 되겠다는 서약은 빈말이 아니었다.

의병 탄압, 독립운동가 검거... 승승장구한 친일파 이성근
 
 대의당 창당대회가 열린 부민관 (현 서울시의회 청사)
ⓒ 위키미디어 공용
 
대의당은 조직폭력배 출신인 친일파 박춘금이 친일 문인 이광수 및 매일신보사 사장 이성근 등과 함께 조직한 친일 정당이다. 이 당이 그저 그런 당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시선도 있었다.

1945년 6월 24일 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인 부민관에서 진행된 대의당 결성식 현장,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3권 대의당 편은 이날 행사에서 "일반석으로부터 이날의 감격과 감상을 겸하여 '유명무실한 당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는 부탁"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다른 표현도 아니고 '유명무실하게 되지 말라'는 응원이 청중석에서 나온 것은 이들이 미덥지 않게 보인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때, '성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자며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선창한 인물이 이날 행사의 좌장인 이성근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발행하는 그가 성수만세를 외쳐 유명무실 정당 운운을 덮고 분위기를 바꾼 직후에 제1부 행사가 끝났다. 기념 강연들이 마련된 제2부가 끝난 뒤, 악단이 선두에 서고 당원들이 뒤에 서는 가두 행렬이 남산 조선신궁에 올라 참배하는 것으로 창당대회는 막을 내렸다.

이날 창당대회에서 만세 선창으로 장내 분위기를 전환시킨 이성근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뒤인 1887년에 황해도 금천에서 출생했다. 이곳은 자동차 도로를 기준으로 지금의 개성시에서 북쪽 45km 정도 되는 곳에 있다.

20세 때인 1907년 5월 황해도 순검이 되고 6월부터 7월까지 황해도 순검교습소에서 연수를 받은 이성근은 그 직후에 커다란 실적을 쌓았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성근 편은 "1907년 7월 황해도관찰도 해주경무서 순검에 임용되었다"라며 "해주경무서 순검으로 근무할 때 해주수비대와 함께 해주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진압"했다고 한 뒤 "의병 탄압에 참여한 공로로 1907년 10월 위로금을, 같은 해 12월에는 특별상여금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고자 이상설·이준·이위종과 호머 헐버트를 1907년 6월 15일에 개막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다가 그해 7월 18일 일본의 압력을 받아 퇴위조서를 발표했다. 그런 뒤 후임자인 순종이 일본의 압력 하에 군대해산 조칙을 발표하는 일이 그달 말일에 있었다. 이에 격분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의병항쟁을 벌이던 시기에 신참 순검 이성근이 의병 진압에서 두각을 보여 두 차례나 상금을 탔던 것이다.

이성근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1915년에는 '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그 뒤 수차에 걸쳐 일제 훈장을 받았다. 1934년에는 만주사변과 관련해 하사금도 받았다. 거기다가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날부터 일제가 패망하는 날까지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의 단 하루도 친일재산으로 살아가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19년에는 3·1운동 진압에 참여했고, 평안북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때인 이듬해에는 독립단·보합단·정의단 소속의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했다. 이런 실적들을 발판으로 40세 때인 1927년 전라남도 내무부 산업과장으로 전직한 그는 1932년에 부지사급인 함경북도 참여관이 되고 1939년에 충청남도 지사가 된 뒤 1941년에 매일신보사 사장이 됐다. 이 직책은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까지 역임했다.

독립투사들을 검거하던 고등경찰이 나이 마흔에 행정관료로 전업하면, 그런 일이 지겨워져 손을 씻고 싶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행정직 전업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의 주특기가 여전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고위 행정관료가 된 뒤에는 한국인들을 동원해 전쟁 지원 활동에 참여시키는 데에 적극성을 발휘했다. 행정관료 재직 중에 서보장이라는 훈장을 네 번이나 받은 이유다.

경찰 시절에는 독립투사들을 검거해 한국인들의 에너지가 독립군으로 향하지 못하게 했던 이성근은, 행정관료가 되어선 전쟁 지원을 강요해 한국인들의 에너지가 일본군 이외로 향하지 못하게 했다. 경찰 시절이나 행정관료 시절이나 그가 하는 일의 본질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한국인 30만 명 학살 음모'

그런데 이성근의 친일이 그 정도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한 친일청산이 한창일 때인 1949년 2월 혁신출판사에서 간행돼 친일 분야의 대표적 문헌이 된 <민족정기의 심판>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이성근이 참여한 대의당이 한국인 30만 명을 학살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을 전한다.

<민족정기의 심판>은 1923년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때 일제를 도운 박춘금이 일제강점기 막판에 국면 전환을 위해 반일세력 30만 명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 작업을 위해 결성한 당이 대의당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듣기만 하여도 소름이 끼칠 잔인무도한 흉계를 꾸미기 시작하여 군·관 당국과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고 마침내 조선 내외 항일·반전 조선민중 30만 명을 학살할 것을 하청부 받아 관동진재 때 재일동포를 죽창으로 학살시켰던 극악무쌍한 잔인성을 충분히 발휘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박춘금은 박흥식·이광수·이성근·김동환·신태악·김민식 등과 공모하여 가지고 대의당 조직에 착수하였다."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의 무력 공격으로 1949년 6월에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 이는 <민족정기의 심판> 후속작이 나오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는 이 책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반민특위의 해체로 후속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후속작이 나왔다면 '30만 학살 음모'가 보다 명확히 밝혀졌을지 모른다. 

'우리는 국가의 일개 병졸이 되겠다'며 일제 위성정당을 자처한 대의당과 이성근은 30만 학살 음모 같은 것을 실행해 볼 겨를도 없었다. 출범 다음달에 폭탄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창당 1개월 뒤인 7월 24일 대의당은 부민관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열었다. 이성근이 개회사를 한 이날 행사 때 항일투사 조문기·강윤국·유만수 등이 부민관에서 폭탄을 터트려 충격을 주는 일이 있었다.
 
 대의당 아세아민족분격대회 당시 폭탄을 터트린 (왼쪽부터) 강윤국, 류만수, 조문기 지사
ⓒ 위키미디어 공용
 
창당 1개월 만에 대의당의 기를 꺾는 이런 일이 일어난 데 이어, 창당 2개월 뒤에는 8·15해방이 있었다. 이성근·박춘금의 '대의'는 그렇게 꺾이고 말았다.

이성근은 일제가 무너진 뒤에도 한동안 상황을 관망했던 것 같다. <친일인명사전>은 "1945년 10월 매일신보사 사장에서 물러났다"고 말한다. 전직 정보경찰치고는 상황 판단이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사망 연도를 알 수 없는 그의 뒷이야기를 위 사전은 이렇게 정리한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며 2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그해 3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의해 기소되어 공판이 진행되었으나, 같은 해 8월 31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50년 8월 6·25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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