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천'의 시인 천상병 부인 목순옥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목순옥 님 만나보기 서울 관훈동에 자리한 <귀천>을 꾸리는 목순옥 님 남편은 천상병 시인입니다. 강태열 시인과 얽힌 옛이야기를 되새기면서 몇 가지 안부인사를 띄웠습니다. 30분 넘게 찍었으나, 촬영기에 문제가 생겨서 1분 남짓밖에 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 이성진/배다리지키는시민모임 |
1960~70년대 문단 주위에 기인 시인이 있었다.
"거무스레한 얼굴에 자주 껌벅이는 눈, 더듬거리는 말, 줄 담배와 폭음, 애교 섞인 용돈 수금(?) 등으로도 고은·김관식과 함께 한국문단 3대 기인으로 불릴 만했다."(<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①>)
서울상대 출신이지만 세속의 욕망을 접고 문단 주위에서 지인들에게 천진스런 행동으로 악의 없이 손을 내밀고 "천 원만"을 얻어 근근히 살아가던 기인이었다. 천상병 시인이다.
박정희 중앙정보부는 1968년 7월,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백림 거점 북괴 대남 공작단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안사건을 발표했다. 서독거주 작곡가 윤이상, 파리거주 화가 이응로 등 34명의 예술인과 유학생이 포함되어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앙정보부는 여기에 천상병을 끼워 넣었다. 서울상대 동기생이 간첩이란 사실을 알고도 당국에 고지치 아니했다는 불고지죄와 형법상의 공갈죄로 엮었다.
천 시인에 대한 공소장은 반공법 외에 형법상의 공갈죄가 포개졌다. 검찰은 그가 '생업'으로 지인들에게 "천 원만" 하고 얻어 쓴 돈을 협박하고 갈취한 것으로 몰았다. 다음은 공소 사실 제3항이다.
1965년 10월 경부터 1967년 6.25까지 사이에 같은 방법으로 동인을 협박, 동인으로부터 1주일에 1, 2회 씩 서울 명동소재 금문다방, 송원기원 등지에서 주대 100원 내지 500원 씩 도합 금 30,000 가량을 교부받아 이를 갈취하고…….
여기서 '동인(강빈구)'은 천상병의 서울상대 동기생으로 동백림사건의 피의자로 구속된 인물이다.
절친한 대학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여 2년 동안 매주 1, 2회씩 처음엔 6,500원을, 그 다음엔 100원 내지 500원씩 갈취했다는 것이다. 2년도 채 안 되는 동안 매주 한두 번씩 상습적으로 뜯어낸 돈의 합계가 36,500원이라? 간첩신고 협박에 100원씩, 많아야 500원을 갈취했다? 이것은 코미디였다.(앞의 책)
천 시인은 정보부에서 세 차례나 전기고문을 당해 혼절한 상태로 조사를 받고,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는 사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 항소를 포기하였다. 다시 거리로 나선 그는 고문 후유증이 겹쳐 행려병환자로 입원하고 간호사이던 목순옥 씨와 만나 1972년 결혼하였다. 부인이 인사동에 찻집 '귀천'을 열면서 지인들에 대한 '수금'은 그치고, 아내에게 하루 2천 원씩 용돈을 타 쓰며 시를 짓다가 1993년 4월 '귀천'하였다.
헌신적인 여성이 있었다. 간호사로 일하다 그를 알게 되고 고난의 삶을 함께하였다. 그의 <천상병 시인과 함께한 이승의 소풍>을 발췌한다.
칠십일 년 남편은 오랜 시간 몸이 불편했던 나머지 행려병자라 하여 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병명은 영양실조와 정신황폐증이었다. 오랜 세월 자기자신의 몸관리를 할 수도 없이 혼자서 생활했던 탓도 있다면 있겠지만, 육십칠 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의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어 남편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몇 개월간 병을 앓고 부산집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날 저녁, 길에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정신병자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구개월 동안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친구들은 남편이 죽었다고 안타까워했고, 그때까지 책 한 권을 만들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면서 원고를 정리해 시집을 만들게 되었다. 온갖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 민영 선생님이 원고를 모으고 성춘복 선생님이 돈을 마련해주신 덕분에 '유고시집'이라 하여 <새>가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남편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유고 시집을 만들게 된 최초의 사람이 되기도 했던 별난 사람이었다.(중략)
"그래, 도와 드리자"라는 결심을 했다. 앞으로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런지 하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도와드리자 하는 그 마음 한 가지였다. 그래서 칠십이년 사월 말일 남편을 퇴원시켰다. 수락산 밑 초가집 방 한 칸을 얻었다. 그리고 오월 십사 일 결혼식을 올렸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와 신봉승씨의 사회로 모든 사람의 축복의 박수를 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출발을 했었다. 남편이라기보다 어린애를 돌보며 보살피는 그런 마음으로 나는 살았다.(중략)
그 많은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남편이 함께 하고 있다는 그 믿음 때문에 나는 주저앉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늘 바라보는 남편의 눈은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나는 피곤도 잊곤 했었다. 팔십팔 년도 간경화증으로 사경을 헤맬 때 춘천의료원에 입원을 시켜놓고 '만삭'이 된 배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밤새워 기도할 때도 쓰러지지 않고 날마다 서울에서 춘천, 춘천에서 서울로 지치지 않고 다녔다. 다섯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녔다. 그렇게 하여 한 주일밖에 못 산다는 병을 고쳐 병원을 나올 때의 기쁨은 온 세상 모든 것이 나의 것인 양 큰 소리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날아갈 것만 같았었다. 남편을 살려서 돌아왔을 때의 나의 기쁨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중략)
나는 아직도 남편이 무덤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가게에 나가 사진을 바라보면 나를 쳐다보면서 살아 있는 것이다. 집에 들어올 때면 집에서 기다리겠지 하는 생각에 뛰어 들어오곤 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그것 뿐이다. 전화벨이 울리면 "마누라구나!"라고 금방 들려올 것만 같은 착각에 나는 마음 조이며 몇 날을 그렇게 지냈다.(후략), (<시와 반시>, 1993년 가을호)
부인이 인사동에 차린 찻집의 상호이기도 하고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천>이다.
귀 천
나는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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