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도 달리는 ‘무궁화호’… 그 뒤엔 승무원들이 있었다 [르포]
설 연휴에도 어둠 뚫고 ‘첫차’ 운행
“설날에도 못 쉬지만 그게 우리 일”
8일 오전 5시20분
설날 연휴를 앞둔 어두컴컴한 새벽, 서울 용산구 용산역 7번 승강장에는 5칸짜리 무궁화호 열차 한 대가 우렁찬 굉음을 내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은 장항선 1551 열차다. 매일 오전 5시34분에 용산역을 출발하는 이 열차는 19개 역을 거쳐 오전 9시22분 전북 익산역에 다다른다.
설날 연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날도 이 열차는 서울에서 출발하는 43편의 무궁화호 가운데 가장 먼저 승객들을 맞았다.
1551 열차는 두 시간 뒤인 7시46분에 용산역을 출발하는 KTX보다 익산역에 늦게 도착할 정도로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충남·전북의 교통 소외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국민의 발’ 노릇을 누구보다 톡톡히 하고 있다.
특히 장항선 무궁화호는 도고온천·청소 등 수요가 거의 없는 역들도 지나치지 않고 정차한다. 코레일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도고온천역과 청소역의 일평균 이용객 수는 각각 87명, 33명에 불과했다. 같은 노선의 홍성역이 2508명, 대천역이 2467명인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수요가 없다시피 한 수준이다.
오전 5시29분
열차 출발 5분 전이 되자 탑승객들이 하나둘 승강장으로 내려왔다. 귀성길 첫차였지만 한산한 승강장의 승객들 표정은 차분했다.
올해로 일한 지 28년이 됐다는 이상호 여객전무는 이른 새벽부터 승강장에서 탑승객을 맞고 있었다. 그는 전날 저녁 승무를 마치고 인근 숙소에서 잠시 잠을 청한 뒤 다시 역으로 출근했다고 한다.
이 여객전무는 “어제 익산에서 저녁 8시11분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왔다”며 “4시간 정도밖에 못 잔 것이다. 우리 승무원들은 남들 쉴 때 일하는 직업이라고 보시면 된다”고 말했다.
오전 5시34분
이 여객전무가 무전기를 들고 손으로 원을 그리자 열차 출입문이 닫혔다. 기차에 올라탄 뒤에도 그는 손가락으로 출입문 개폐기를 가리키며 출입문이 정상적으로 닫혔는지 계속해서 확인했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켜 점검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열차에 여객전무가 혼자 있더라도 수신호를 사용한다”며 “출발 신호나 출입문 개폐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열차가 미끄러지며 서서히 움직이자 사람들은 곧바로 눈을 붙이고 잠에 들었다. 첫차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간간이 독서나 휴대전화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안내 방송이 요란하게 느껴질 만큼 열차 안은 조용했다. 간혹 들리는 코 고는 소리만이 열차의 적막을 깼다.
오전 5시42분
영등포역 승강장에는 용산역에서보다 많은 사람들이 무궁화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 문이 여닫히며 하나둘씩 빈자리가 채워졌다.
원래 무궁화호는 용산보다 영등포에서 더 많은 승객을 태운다고 한다. 이 여객전무는 “영등포에서 수원 구간을 이동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많다”며 “명절에는 바로 뒷시간대 열차부터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은 그래도 사람들이 좀 있는 편”이라고 했다.
뒤따라오던 KTX를 먼저 보내기 위해 무궁화호는 3분가량 더 영등포역에 멈춰 서 있었다. 열차가 영등포역을 출발하자 이 여객전무는 손바닥 만한 전자기기를 들고 검표 작업을 시작했다.
이 여객전무는 “이 PDA(휴대용 단말기)에 승차권이 발매됐다고 표시되지 않은 건 다 빈 좌석”이라며 “거기에 사람이 앉아 있으면 저희가 확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5시54분
“안내 말씀 드립니다. 우리 열차는 신호 대기 관계로 잠시 천천히 가고 있습니다”
방송을 마친 이 여객전무는 “아까 영등포에서 KTX가 먼저 가지 않았나. 철도 시스템은 5㎞·10㎞마다 신호가 하나씩 있다”며 “KTX가 그 구간을 벗어나야 우리 차가 그 선로에 들어갈 수 있다. 앞차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다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옛날에는 신호가 주황색 하나, 빨간색 하나만 있었는데 지금은 다섯 종류라고 한다. 신호 종류가 많으면 열차를 더 빠르고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도시를 벗어난 열차는 아산역을 시작으로 10분에 한 번꼴로 역에 멈춰섰다.
이 여객전무는 “우리 열차가 좀 많이 정차하지 않나. 이게 바로 장항선만의 특징”이라며 “장항선이 좀 낙후돼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도로가 잘 뚫려 있지만 옛날에는 철도 이용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노선보다 정차하는 역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있으면 장항선에도 KTX가 들어오는데, 그렇게 되면 청소역이나 판교역같이 규모가 작은 역들은 다 없어질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오전 8시14분
새벽 어스름이 걷히고, 청소역을 출발해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열차 안으로 강렬한 햇살이 내리쬈다. 잠에 들었던 사람들은 뒤척이는가 싶더니 햇빛 가리개를 들어 올려 창밖을 확인했다.
오전 8시49분
열차가 서천역에 멈춰섰다. 이 여객전무가 출입문 개폐기에 열쇠를 꽂고 출입문 열림 단추를 누르자 모든 출입문이 열렸다. 그는 내리자마자 좌우를 살피며 손가락으로 출입문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는 이 역시도 ‘지적 확인’ 과정이라고 소개했다.
이 여객전무는 “문이 열렸는지 안 열렸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안전 관리”라며 “모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저희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사람들이 역에 도착하면 잘 내려야 한다. 그런데 문이 고장 나서 닫혀 있는 걸 우리가 확인하지 못하면 승객들이 못 내릴 수도 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출발 신호는 기관사뿐만 아니라 저희도 봐야 한다. 빨간불인데 가자고 하면 안 되지 않나”며 “옛날에는 빨간불이었는데 출발해서 발생하는 사고가 많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오전8시55분
“우리 열차 장항역에서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우리 열차는 장항역에서 마주 오는 열차와 비껴가는 관계로 잠시 더 정차하겠습니다.”
장항선은 아직 단선 구간인 곳이 많아 마주 오는 열차와 교행하기 위해 역에서 오래 멈춰 있는 경우가 잦았다.
장항역 도착 안내 방송을 마치자 이 여객전무가 취재진에게 선뜻 방송실 내부를 소개해 줬다. 성인 남성이 팔을 뻗기도 어려운 한 평 남짓의 공간이 펼쳐졌다.
방송실은 열차 안내 방송을 내보내기 위한 손때 묻은 장비들로 빽빽했다. 그의 무전기와 가방,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작은 탁자도 있었다. 사실상 이 여객전무의 ‘움직이는 사무실’이었다.
오전 9시22분
“우리 열차는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익산, 익산역에 도착합니다.”
장항선 첫차의 길고 긴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열차가 들어선 9번 승강장에는 10번 승강장으로 들어올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귀성객들이 가득했다.
광주에 거주하는 이수정(34)씨는 오전 9시45분에 출발하는 용산행 새마을호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설을 맞아 본가가 있는 대천을 찾는 길이라고 밝힌 이씨는 설레는 표정으로 양손 가득 명절 선물을 들어 보였다. 그는 “대천을 갈 수 있는 방법이 기차밖에 없었다”며 “명절을 잘 쇠고 오겠다”고 수줍게 말했다.
같은 시각, 이 여객전무는 마지막까지 열차에 남아 차내 정리를 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설 명절이 궁금해졌다.
고향이 전북 남원인 이 여객전무는 설 연휴에도 근무가 있다고 했다. 그가 연휴 동안 가족을 볼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뿐이다.
그는 “저희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이 쉬는 주말이나 연휴에 더 바빠진다. 원래 9~10일 이틀이 제가 쉬는 날인데, 이번엔 설 연휴가 겹쳐 10일에도 근무를 하게 됐다”고 했다.
설을 맞는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설은 거의 포기했다. 승무원은 철도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라며 “‘철도 짬밥’이 오래됐다고 하는데, 이제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게 저희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여객전무와의 동행을 마치고 익산역 대합실에서 취재 내용을 정리하던 취재진은 열차에서 내린 그와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 누구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 그가 먼저 살갑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찍 일어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
박종혁·임소윤 인턴기자 onlinenews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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