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11년 끌었다…남편·시어머니 허위 고소한 며느리 수법
2009~2019년 수차례에 걸쳐 남편과 시어머니를 허위 사실로 고소(무고)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A씨는 2022년 6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남편이 근무하는 직장에 허위 사실을 쓴 입간판을 설치하고, 시어머니가 다니는 교회에 허위 사실을 담은 유인물을 뿌리는 등 명예훼손 혐의도 더해졌다.
그러나 범행 내용보다 주목받았던 건 재판에 넘겨진 뒤 1심 선고까지 걸린 기간이었다. A씨가 검찰에 의해 기소된 건 2012년 9월이어서 1심에만 9년 9개월이 소요됐다. A씨와 검사 측이 쌍방 항소하면서 2심 선고는 또다시 1년 3개월이 지난 지난해 9월 이뤄졌다. 2심에선 징역 2년1개월이 선고됐다. A씨는 상고했지만 지난해 10월말 상고를 취하하면서 재판은 11년 1개월만에 막을 내렸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 사례를 두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거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재판 지연 시도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A씨는 1심 과정에서만 총 11번 법관 기피신청을 했다. 재판부를 믿을 수 없으니 바꿔 달라는 요구다. 재판부가 기각하면 즉시 항고했고, 즉시 항고가 기각되면 재항고했다. 국민참여재판을 해달라는 요구도 9번 했고, 하위 법률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위헌심판제청도 3번 했다. 이 외에 보석·구속취소·구속적부심사·관할이전 등도 신청했다.
형사소송, 대법원까지 가면 평균 15~17개월 걸린다
간첩단 사건 등에서 두드러졌던 ‘재판 지연 전략’이 대규모 부패사건이나 일반 형사사건에서까지 악용되면서 재판 장기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복잡 사건의 증가, 법관 수 부족,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상실 등 환경적·제도적 요인까지 겹치면서 가뜩이나 느린 사법절차가 더 느려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법원이 발간한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형사공판 합의 사건은 1심 선고까지 평균 6.8개월이 걸렸다. 2018년(4.9개월)보다 1.9개월 늦어진 셈이다. 항소심의 경우 고법은 5.2개월, 지방법원은 7.2개월이 소요됐다. 상고심은 3.2개월이 걸렸다. 만약 대법원까지 사건을 끌고 갈 경우 평균적으로 1년 3개월~1년 5개월을 소송에 쓸 각오를 해야 한다는 소리다.
재판이 길어지면 담당 법관이 바뀌고 피고인의 구속 기간이 도과돼 풀려나는 등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는 게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상대 당사자와 국가의 소송비용 증가 등 인적·물적 낭비가 심해지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침해된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재판부가 바뀔 경우 간이하게 공판을 갱신해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는데, 만약 (피고인이) 반대한다면 그간 해왔던 모든 증인신문 녹취 파일 등을 법정에서 새로 틀어야 한다”며 “수년을 끌어온 사건의 경우 녹취록을 듣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또 “피고인이 여러 명인 경우 돌아가면서 법관 기피신청을 하기도 한다”며 “이 경우 기피신청을 한 본인의 구속 기간은 늘어나지만, 나머지 피고인의 구속 기간은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재판을 중단하고 구속 기간만 허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참여재판·변호인교체·위헌심판…방법도 가지가지
대표적인 게 2021년 9~11월 피고인 6명이 구속기소 된 청주 간첩단(자주통일충북동지회) 의혹 사건이다. 피고인 중 3명은 기소된 지 4개월 후인 2022년 1월 1차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했는데, 기각되자 다음 달 즉시 항고, 그 다음 달 재항고했다. 그사이 인사이동으로 재판부가 바뀌었고 피고인 중 1명은 구속 기간 만료로 석방됐다.
이후 피고인들은 변호인을 새로 선임했는데 사건기록 검토 등을 이유로 4개월간 공판기일을 연기했다. 그 후엔 2차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했고 기각→즉시항고→재항고 절차가 반복되면서 2022년이 지나갔다. 지난해 4월 재판이 재개되자 곧바로 3차로 기피신청을 했다. 이 사건은 총 5차례 기피신청이 이뤄졌고 기소 후 2년 5개월이 지난 오는 16일 1심 선고가 예정돼있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핵심 피고인인 경기도의 불법 대북송금 의혹 등 사건 재판에선 지난해 8월 변호인이 퇴정하거나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부동의하는 등의 방법이 사용됐다. 이 전 부지사가 검찰에 “대북송금을 이재명 대표에게 보고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자 이 전 부지사의 아내가 법정에서 남편에게 “정신 차려라”고 외친 뒤 변호인 해임신고서를 제출했다. 이후 재판에 들어온 다른 변호사는 “40년 동안 이런 재판은 처음 봤다”며 소리를 지르고 퇴정한 후 사임했다. 재판이 재개할 때까지는 77일이 걸렸고 이 전 부지사는 진술을 번복했다.
檢, “재판정지, 구속 기간서 빼야”…英·美는 무제한
지난 3일 수백억대 전세 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구형받은 ‘건축왕’ B씨가 선고 직전 법관 기피신청서를 내는 등 재판 지연 전략이 확산하자 검찰은 법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판절차 정지 기간은 구속 기간에 산입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지난해 11월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검찰에 따르면 미국·영국은 공판개시 후 구속기간에 제한이 없다. 독일의 경우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가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구속기한에 제한이 없다. 일본은 구속 기간이 2개월이지만 법원이 1개월마다 갱신할 수 있고 갱신횟수에 제한이 없다.
검찰 관계자는 “소송지연 목적이 명백한 신청의 경우 공판 정지 효력을 배제해야 한다”며 “판사 변경이 있을 때마다 이미 진행된 사건을 반복하다시피 갱신절차를 진행하는데, 관련 법령을 정비해 법원 직권으로 간이하게 갱신절차를 할 수 있도록 여지를 두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정원·양수민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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