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연에게 배우는 '어른의 대화법'
[홍현진 기자]
오랫동안 내게 장도연의 이미지는 '개그우먼 같지 않은 개그우먼'이었다. 장도연의 절친인 박나래가 상황극과 입담으로 빵빵 터지는 개그를 한다면, 공개 코미디에 나오는 장도연은 어쩐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했다. 박나래가 그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다면 장도연은 스스로도 민망해하고 어색해하는 것 같달까.
장도연이 MC로서 역할을 할 때도 딱히 존재감이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제로 장도연은 "캐릭터가 없다", "색깔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스스로도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그런 장도연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지난해 59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이었다. 함께 MC를 맡은 배우 차인표는 장도연에게 배우 손석구가 장도연을 이상형으로 뽑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처음에는 능청스럽게 받아주던 장도연은 차인표가 또 한 번 '손석구의 이상형 장도연'을 말하자 웃으면서 한 마디 한다.
"그만 좀 하시죠."
짧은 순간, 장도연의 내공을 느꼈다.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누구도 기분 나쁘지 않게, 지켜보는 사람도 웃을 수 있는 멘트를 하는 센스라니. 이어진 장면에서 시상자로 나온 배우 변요한이 대본에 수상자 발표 전에 5초 정도 쉬어달라고 대본에 나와있다고 말하자 장도연은 마이크를 대고 말한다. "5, 4, 3, 2, 1." 긴장이 풀리고 좌중의 웃음이 터진다.
▲ <살롱드립>에서 장도연은 인터뷰를 하는 상대방이 최대한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
ⓒ TEO |
MC 장도연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어느 누구와도 케미(화학작용)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개그맨 이경규는 장도연에게 "너는 누구하고나 티키타카를 할 수 있는 개그우먼"이라면서 "너는 캐릭터를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개그우먼이 되면 되는 거야"라고 조언했다. 장도연의 '캐릭터 없음'은 MC로서 오히려 강점이 된다.
장도연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살롱드립>을 보면 MC 장도연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살롱드립>은 MBC 출신 김태호 PD가 설립한 TEO에서 제작하는 웹 예능이다. 시즌1에서는 귀족들의 티타임이라는 격조 있는 콘셉트를 지향했다면, 지난해 8월 시작된 시즌2에서는 모든 콘셉트를 버리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토크에만 집중한다. 전략이 통한 걸까. 시즌1에 비해 시즌2는 훨씬 높은 조회수와 화제성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장도연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엄청난 에너지로 좌중을 압도하는 MC는 아니다. 장도연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하기보다는 인터뷰를 하는 상대방이 최대한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살롱드립> 시즌2 첫 게스트로 출연한 개그맨 조세호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소 약하더라도 그게 강한 이야기처럼 웃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더라도 너무 중요한 이야기처럼 들어주는 것이 장도연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장도연과 MBC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기안84는 <살롱드립>에 출연해 처음에는 낯을 가리는 듯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살롱드립>이 김태호 PD 방송이냐고 묻는 기안84에게 장도연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닌데? 나영석 PD님 건데?"라고 장난을 친다. 어리둥절해 하는 기안84에게 장도연은 "뻥이요"라면서 기안84를 웃게 만든다. "어이없게라도 웃게 만들어주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장도연 덕분에 기안84는 긴장을 풀고 대화에 임한다.
기안84는 장도연의 최대 장점으로 '배려'를 꼽으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원래는 남들을 깎아내리면서 웃기는 게 쉽잖아, 넌 그런 걸 안 하더라고."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기이한 것으로 소비되는 기안84의 요리법에 대해서도 장도연은 섣불리 평가하거나 조언하지 않는다. 리액션을 하며 경청하다가 "되게 소소한 거에 행복할 줄 아네. 시도를 많이 한다. 낭비하는 걸 싫어하네"라며 기안84의 장점을 끄집어낸다. 기안84가 흥미를 갖고 대화할 수 있도록 일본에서 미술 전시를 보고 왔던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본인의 전공 분야가 나오자 기안84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살롱드립>을 보면 처음에는 경직된 것 같았던 인터뷰이들이 장도연의 리액션과 질문 덕분에 점점 경계를 풀고 신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장도연은 중간중간 개그우먼으로서의 장기를 발휘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농담을 건네기도 하면서 인터뷰이들에게 판을 깔아준다. '무례한 듯 친절한 듯 장난스러운 짓궂은 질문'(<살롱드립> 엔딩 멘트)을 던지면서.
▲ 장도연 코미디언(자료사진). |
ⓒ MBN-LG헬로비전 |
최근에는 방송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홍보하는 채널로 <살롱드립>을 선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배우 김서형 편이 기억에 남았다. 할 말이 없는 단톡방에서는 나가버리고, 자주 소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SNS를 끊는다는 김서형에게 장도연은 대체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이렇게 반응한다.
"되게 상대로 하여금 집착하게 만들 것 같아요. 옭아매고 싶게 만드네. 자극하네."
타인이 갖고 있는 성격이나 특징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대방을 조롱하지 않으면서 재미 요소를 만들어내는 것. 나는 이렇게 토크를 풀어내는 사람을 한 사람 더 알고 있다. 바로 개그맨 신동엽이다. 장도연이 '개버지(개그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동엽은 <살롱드립> 게스트로 출연해 장도연이 훌륭한 인터뷰어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계속 질문할 수 있는 내공이 장도연에게 있다고.
방송에서 김서형과 장도연은 번아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장도연은 김서형과 눈을 마주 보면서 정말로 공감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번아웃 속에서도 루틴을 지키며 회복의 시간을 보냈다"는 김서형에게 다행이라고 말해준다. 그러자 김서형도 장도연에게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
장도연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예전에는 들어오는 일은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모두 했는데 몸이 힘들더라고. 그럼에도 다들 이렇게 힘들게 일하며 살 거라 생각했다고. 지금은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내가 뭘 잘할 수 있고 뭘 했을 때 덜 스트레스를 받는지 선택할 수 있게 됐다고.
이번에는 장도연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서형을 보면서 '대화'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렸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 김서형 편에는 "카메라 신경 안 쓰고 둘이 눈 마주치면서 진짜 인생 얘기하는 느낌이라 더 푹 빠져봤어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전적으로 공감했다. 오랜만에 어른의 대화를 봤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장도연의 내공은 삶에 대한 고민과 통찰에서 나온다. 매일 신문을 보고, 일기를 쓰고, 하루 10분이라도 책을 읽는다는 장도연은 자신이 읽은 것, 경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겸손하고 위트 있게 들려준다. 본인이 충분히 곱씹고 소화한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장도연의 말은 공허하지 않다.
장도연은 신동엽에게 "신문을 읽다가 '긴 시간을 버틴 것에는 부드러운 힘이 있다'라는 글귀를 읽으면서 신동엽이 떠올랐다"고 말해준다. 읽고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을 떠올리고 이해하려는 마음. 방송을 보면서 장도연과 대화를 하면 참 따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는 말할 것도 없고.
가수 정재형은 자신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요정식탁>에서 "장도연이 한 시상식에서 시간을 끌기 위해 3분 동안 수상 소감을 하는 영상을 보면서, 거기 누구 하나 괴롭히고 누구 하나 잡아서 이런 게 아니라, 자기도 우아하게 지키며, 자기도 우아하게 무너지며, 그런 걸 해내기 때문에 장도연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아한 무너짐'이라니. 이보다 장도연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자신을 낮추고 기꺼이 무너지지만 결코 초라하거나 약해 보이지 않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요정식탁>에서 장도연은 이제는 "나로 일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웃긴 사람이고, 내가 재밌으면 좋겠는데,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민망했던 시기'를 지나 장도연은 비로소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이 무엇인지 찾은 것 같다. MC 장도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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