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총살 명령한 자와 거부한 자... 두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운명

임재근 2024. 2. 1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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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경찰영웅' 문형순과 '학살가담' 김두찬

[임재근 기자]

 2018년 ‘올해의 경찰 영웅’에 선정돼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세워진 문형순 서장의 흉상.
ⓒ 임재근
     
지난 2018년 경찰청은 '한국판 제주 쉰들러'로 불린 고 문형순 경찰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경찰영웅증서에는 "우리 경찰의 오늘은 경찰영웅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를 경찰정신의 귀감으로 삼아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하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1일,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세워졌습니다. 경찰이 문형순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한 이유는 1949년 모슬포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좌익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 명을 자수시켜 훈방시켰고,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8월 30일에는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에서 내려온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 한다'며 군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해 주민 200여 명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모슬포경찰서에서 한림·한경·대정·안덕 등지에서 검속된 200여 명이 섯알오름 등으로 끌려가 집단 총살당한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주민의 목숨을 구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8일부로 전국적으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제주도에서는 4.3의 마무리 토벌을 위해 주둔하던 해병대의 신현준 사령관이 제주지구계엄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상황이라 아무리 경찰이라 하더라도 군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중령 김두찬이 제주 성산포 경찰서장 문형순에게 보낸 ‘예비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 문서. 1950년 8월 30일자로 보낸 문서에는 발송인 김두찬 이름 아래 직인이 찍혀 있다. 이 명령을 받은 문형순 서장은 오른쪽 위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과 함께 자신의 이름 문형순(文亨淳)까지 적고(붉은색 사각형) 문서를 돌려보냈다.
ⓒ 임재근
 
하지만 문형순 서장의 결단은 '원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항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항명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명령이 '정당'해야만 합니다. 문형순 서장은 군인과 경찰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본연의 의무라는 생각에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무고한 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은 '부당한 명령'이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문형순 서장이 이와 같이 원칙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 그의 삶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1897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문형순 서장은 일제강점기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의용군, 고려혁명군, 국민부, 광복군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습니다.

해방 후 1947년 5월 제주경찰감찰청 기동경비대장에 임용되면서 경찰에 투신했습니다. 해방 후 재등용 된 친일 경찰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당시 경찰 상황을 생각하면 문형순 서장의 경찰 투신은 특별해보입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이 경찰에 투신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의 목숨을 살려내 경찰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4.3 때 '주민 학살' 문서 발송한 독립운동가
  
문형순 서장이 2018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되면서 부당한 명령에 항거한 문형순 서장의 삶과 행동이 재조명됐습니다. 그렇다면 부당한 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였고, 그는 어떻게 됐까요?

당시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을 발송한 이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이었습니다. 문서의 내용은 제주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성산포경찰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 경찰에서 총살 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김두찬 중령은 특이한 군 경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시절 통위부 참위(소위)로 임관했으나 부임 받은 경리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뒀습니다.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했지만, 과정 이수 도중 해군으로 전입했습니다.

김두찬은 한국전쟁 발발 시 묵호기지사령관으로 있다가 철수하는 과정에서 해병대로 전입해 제주도로 왔습니다. 해병대가 제주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12월 28일이었습니다. 4.3과 관련해 토벌 작전을 펴기 위해 기존 부대와 교대를 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4.3 진압뿐 아니라 예비검속에 이은 피 비린내 나는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김두찬은 1950년 7월 30일부로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사령부 정보참모에 임명됐고, 한 달 후 '예비 구속자 총살 집행 의뢰의 건'의 명령을 경찰에 하달했던 것이었습니다.
 
 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193호의 김두찬 묘. 그의 묘비에는 ‘해병중장’이라는 수식어 옆에 ‘애국지사’가 함께 새겨져 있다.
ⓒ 임재근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경찰서장을 영웅으로 선정했다면, 그 부당한 명령을 내린 군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명령과 관련해 김두찬은 아무런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해병교육단장, 해병 제1상륙사단 사단장을 거쳐 승승장구하며 해병대 최고봉인 해병대사령관까지 역임했습니다. 1964년 중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충주비료(주)의 고문, 대한조선공사 사장, ㈜한성 사장 등을 지냈습니다. 2011년 12월 30일에 사망한 김두찬 중장은 장성급(將星級) 장교 자격으로 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193호에 안장됐습니다.
  
김두찬의 대전현충원 묘비에는 '해병중장'이라는 수식어 옆에 '애국지사'가 함께 붙어있습니다. 김두찬은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중인 1936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연행돼 구류처분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3년에 미쓰비시재벌 계열사가 운영하던 핵심군수공장이었던 겸이포제철소 용광로 폭파계획을 세우다 일경에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런 공훈을 인정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습니다. 김두찬 중장은 독립유공자 묘역에 묻힐 수도 있었지만 장군 묘역을 택했습니다.

두 독립운동가의 엇갈린 선택

일제강점기 다른 영역에서 항일운동에 나섰던 두 사람은 해방 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한 사람은 경찰에 투신했고, 다른 한 사람은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군인이든, 경찰이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본분을 갖고 있었지만 한국전쟁 직후 제주도에서 문형순 서장과 김두찬 중령은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두 사람의 삶도 달랐습니다.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며 군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던 문형순 서장은 1953년 경찰을 그만뒀고 쌀 배급소 등에서 일하며 홀로 지내다 1966년 유족도 없이 사망했습니다. 문형순 서장의 유해는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평안도민회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문형순 서장은 독립유공자 심사를 6차례나 신청했지만 국가보훈부는 '자료상의 인물과 동일인 여부 불분명', '독립운동 활동 당시 입증자료 미비' 등을 이유로 들어 사실상 기각 판정인 '서훈 보류'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경찰은 문형순 서장이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재직하며 지리산 전투사령부에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독립유공이 아닌 참전유공으로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요청했고, 참전유공자 서훈이 확정됐습니다.

참전유공자가 된 문형순 서장이 제주호원 등 국립묘지에 안장될 조건을 갖추었지만, 그렇게 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점과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당한 명령을 내린 군인은 아무런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고 죽자마자 국립묘지에 안장된 엇갈린 삶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한편, 지난 2019년 11월에 해병대는 포항 해병대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터를 '김두찬관'으로 명명해 개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4.3 관련 단체들이 강력히 항의했고, 결국 국방부의 시정조치로 2020년 2월 3일 '김두찬관' 간판은 내리고 며칠 후 '충성관'으로 교체했습니다.
 
 2024년 2월 6일, 제주도교육청 4.3평화인권교육지원단 역량강화 연수로 대전현충원 답사를 온 참가자들이 장군 제2묘역에 안장된 김두찬 중장의 묘 앞에서 제주 4.3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임재근
   
[참고자료]

정채호, <해병대의 명인 기인전 제1권>, 용성출판사, 2003
제주지방경찰청, <2018 경찰영웅 故 문형순 경찰서장> 리플렛
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_양민학살 진상조사보고서>, 월간 말, 2000
해병대사령부, <해병발전사 - 해병이십년사 自 1949,04,15, 至 1960,12,31>,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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