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조율만 돼도 직접 육아 가능" 유연근무가 가져온 기적[K인구전략]

정현진 2024. 2. 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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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근무에 아이 등원길 함께한 워킹대디
아이 미소에 흐뭇…아내 재취업 성공
퇴사 위기 워킹맘, 경력단절 막고 커리어 유지
"육아 친화 분위기 중요…부모도 책임감 갖고 일해야"

편집자주 - 대한민국 인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기업에 있다. 남녀 구분 없이 일로 평가하는 기업 내 분위기와 가정 친화적인 문화가 곧 K인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출산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적어도 일터에서의 부담감이 걸림돌이 돼 아이 낳기를 주저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시아경제는 가족친화 정책을 선도하는 기업을 찾아가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지점을 짚고, 현실적인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기업과는 다각도에서 함께 방법을 찾아볼 예정이다. 이를 통해 기업부터 변하도록 독려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도 분석한다. 금전적 지원보다 심리적 부채감을 줄여주는 회사의 문화와 분위기가 핵심이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다양한 측면에서의 대안을 제시한다.

# "솔직히 이전에는 제가 회사를 다니니 아내가 혼자 집에서 육아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제가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집안 분위기가 더 좋아졌고, 집에서 아내와 싸우는 일이 없다 보니 일에 몰입하게 됐습니다." 워킹대디 진광일씨(38·남)는 지난해 매주 화·금요일에 직접 다섯 살, 네 살배기 아들 둘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등원시켰다. 그가 이렇듯 직접 육아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그의 직장인 소프트웨어 중소기업 모션이 오전 7~10시 중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강서구에서 진광일 씨가 출근에 앞서 두 자녀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있다.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 "아이가 어리면 자주 아픈데, 그럴 땐 재택근무를 선택해요. 따로 신청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재택인지 아닌지만 동료들에게 공유하면 돼요.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죠." 워킹맘 김수지씨(36·여)는 오후 5시가 되면 일을 하다가도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가서 네 살 딸을 데려온다. 핀테크(금융+기술) 기업 핀다가 시행하는 유연근무제 덕분이다. 핀다는 일주일에 40시간을 자유롭게 채우면 되는 '커스텀 워크(개인 맞춤형 근무)' 제도가 보편화돼 유연하게 근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재택근무 중인 핀테크 기업 핀다의 김수지 씨가 딸 김은하 양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와 무엇하고 놀았는지 이야기하며 웃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워킹맘·대디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 건 바로 육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사무실까지 1시간이 넘는 출·퇴근 길을 거쳐 하루 최소 8시간을 일하다 보면 아이를 돌볼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아이 곁에 있기도 쉽지 않다.

근무 시간과 장소를 유연하게 만들어 일하는 부모가 일과 육아를 적절히 조율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 기업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이를 활용하면 부모가 조부모 등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비교적 덜 받고 직접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차출퇴근제부터 완전 재택근무까지…형태 다양

유연근무제는 시차출퇴근제부터 완전 재택근무 제도까지 형태가 다양하다. 과거 '나인투식스(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방식)', '반드시 사무실 출근' 등 기존에 고정돼 있던 근무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풀고 근로자가 회사와 합의하에 유연하게 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관련기사 : "근무시간·장소 '족쇄' 푼다"…육아 돕는 유연근무 '각양각색'[K인구전략])

국내에서 가장 많이 활용 중인 유연근무제는 시차출퇴근제다. '자율출퇴근제'라고도 불리는 시차출퇴근제는 기존의 소정근로시간, 보통은 하루 8시간 근무시간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제도다. 진 씨의 회사인 모션이 적용하고 있는 제도가 바로 시차출퇴근제의 대표적 사례다.(관련기사 : 동료에 수백만원 보너스…"육아휴직 더 팍팍 써라" 응원[K인구전략]) 이 제도는 대기업에서도 이미 2010년대부터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대대적인 실험이 진행됐던 유연근무제 유형 중 하나는 재택근무다. 시차출퇴근제나 근로시간 단축근무제, 선택적 근무시간제 등 일하는 시간의 제약을 푸는 방식과는 달리 근무 장소를 유연하게 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최근에는 업무 시간 내내 집에서 일하는 전면 재택근무보다 사무실 출근과 결합한 일명 '하이브리드 근무'가 주로 활용된다. 이렇게 되면 일주일 중 일부만 사무실로 출근하거나 하루 중 일부 시간에만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다.(관련기사 : '자리비움' 해도 핀잔보다 격려… '육아' 신의 직장 어디?[K인구전략])

기업들은 하이브리드 근무와 시간의 유연성을 주는 제도를 결합해 주로 사용한다. 핀다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코어타임을 지키면 사무실 출근으로 쳐주고, 주 2회 재택이 가능하다. 커스텀 워크를 통해 일주일간 일하는 스케줄을 미리 짜고 공유한다. 반차보다 더 작은 단위인 반반차(2시간)도 적극 활용한다.

LG디스플레이는 2021년 도입한 '육아기 자율근무제'를 통해 초등학교 6학년 이하의 자녀를 둔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근무 조건만 지키면 개인 사정에 따라 출근과 재택을 혼합하거나 퇴근 후 재출근을 할 수 있게끔 한다. 남성 직원 비중이 90%가 넘는 포스코도 2020년 국내 기업 최초로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도입해 워킹맘·대디가 근무 여건에 따라 일정 시간 재택근무를 신청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관련기사 : "대학생 공강시간처럼 일터도" 경력단절 막는 자율근무 도입한 대기업[K인구전략])

한발 더 나아가 업무 전체를 완전히 재택근무로 하면서 일하는 장소의 제약을 풀어낸 회사도 있다. 육아용품 제조업체 코니바이에린은 2017년 창업 당시부터 전 직원 재택근무 시스템을 도입했다. 협업을 위해 한국 시간 기준으로 핵심 근무 시간만 지키면 그 외 시간은 달리 활용할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핵심 근무 시간 중에도 시간 조정이 가능한 '배려시간제'를 도입해 낮 중 육아를 위해 짬을 낼 수 있는 환경도 마련해뒀다.(관련기사 : 돌봄교실 탈락에 멘붕…'워킹맘 무덤' 초1 학부모의 생존비밀[K인구전략])

퇴사 고민 워킹맘 '경력 단절' 막았다…기업도 인재 확보 유리

아시아경제 'K인구전략, 양성평등이 답이다' 기획 취재에 응한 사례자들은 유연근무제를 활용하면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서 육아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기간 중 여성 인재의 경력 단절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데, 근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풀리면서 일과 커리어를 동시에 가져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올해로 17년 차 직장인인 김지숙 LG디스플레이 SC패널 공정개발담당 책임은 2022년 아들이 네 살이던 때에 육아 문제로 인해 퇴사를 결심하고 상사와 면담까지 했다. 하지만 회사의 '육아기 자율근무제' 덕분에 육아하면서 동시에 일을 할 수 있게 돼 퇴사 결심을 거둘 수 있게 됐다. 그는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느끼고 좌절도 많이 했다"며 "때마침 회사에 제도가 생기고 팀장님이 활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면서 지금까지 경력단절 없이 버틸 수 있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코니바이에린의 송명진 브랜드그룹 리드(41·여)도 지난해 회사에 퇴사를 통보했다.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 딸이 낮 12시만 되면 하교해 집으로 돌아오는 통에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초등 1학년이 ‘워킹맘의 무덤’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협업이 한창인 오후 시간에 중간중간 자리를 비워야 해 일이 불가능해 보였다"면서 "업무 시간에 지장을 줄 수가 없어 퇴사하겠다고 말했는데, 회사에서 ‘같이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답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핵심 근무 시간 중에도 시간을 조율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는 등 회사가 빠르게 대응책을 찾은 덕분에 송 리드는 지난 1년을 무사히 보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22일 초등학교 1학년 딸을 등교시킨 뒤 자택에 마련해둔 홈오피스로 출근한 송명진 리드가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제공=코니바이에린)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기업들은 일과 육아의 병행이 환경 덕에 인재를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수지 씨는 이전에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다른 기업에도 근무했지만, 이직할 회사를 고려할 당시 핀다의 '커스텀 워크' 제도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했다. 김수지 씨는 "현대자동차에서는 남초 환경의 부서에서 근무했다 보니 롤모델로 삼을 만한 워킹맘이나 여성 임원이 없었고, 10년 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모션도 이직이 잦은 개발직군에서 2019년 창사 이래로 퇴직자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세 자녀의 아버지인 최종영씨(43·남)는 "연봉이 좀 줄어도 유연근로제가 있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게 아내의 바람이었다"며 "남편이 다니는 회사를 아내가 좋아해 준다는 심리적 지지가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워킹대디 김진환씨(37·남)도 "아내가 허리를 다쳤을 때 반반차를 자유롭게 쓰고 재택근무를 하며 일할 수 있었다"며 "그간 이직을 많이 해왔지만, 현재로서는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가족이 행복하니 나도 즐겁다…"생산성 올라요"

워킹맘·대디가 회사의 근무 제도를 활용해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일과 가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게 되면서 이들 가정의 모습도 크게 바뀌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한층 가까워지는 것은 물론 부모들도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면서 안정감을 갖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시차출퇴근제로 진광일 씨가 직접 아들 둘의 등원을 맡으면서 출산, 육아 문제로 일을 그만뒀던 아내가 새 일자리를 찾았다. 진광일 씨가 육아에 참여한 시간에 아내가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재취업에 성공, 병원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진광일 씨는 “늦게 들어가는 날이면 아내한테 언제 집에 오냐는 잔소리를 듣는다. 그럼 남편도 스트레스를 받아 싸우고 결국 아이 때문에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다"며 "딸이 일하고 밝아지니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나를 더 예뻐하신다"고 말하며 미소 지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코니바이에린에서 제품 개발 업무를 맡은 14년 차 직장인 전민지 MD(37·여)는 둘째 딸 출산 후 육아휴직 8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업무에 복귀했다. 이 회사에 2020년 10월에 합류한 전 MD는 "이러한 환경이라면 일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택근무를 하며 물리적으로 아기 근처에 있을 수 있으니까 베이비시터 서비스를 활용해 집에서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둘째를 갖기로 결정하는 데 회사의 제도가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전민지 MD는 전 직장을 다니던 2019년 첫 출산 당시에도 딸이 돌이 되기 전 복직했다. 그땐 사무실로 출퇴근하면서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베이비시터 서비스를 이용해야 했다. 금전적인 부담이 커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면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중 근무 시간에 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 현실적인 부담은 덜고 친정 부모님도 마음이 편해졌다. 집에서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이와 함께 있다 보니 전 MD는 둘째 딸의 첫걸음마 순간도 포착했다.

육아 친화 분위기 중요…"부모라고 배려 원치 않아"

결국 이러한 유연근무 활용은 육아에 친화적인 기업 내 분위기 속에서 움직인다.

핀다의 김수지 씨는 업무 메신저인 슬랙에 "잠시 하원 시키고 복귀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워킹맘, 워킹대디들이 아이 때문에 30분에서 1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을 배려하고 양해받는 것이 핀다에서는 어렵지 않다. 김 씨는 "일반 기업의 경우 일을 잘하고 있더라도 워킹맘들은 ‘감정적인 부채’가 쌓일 수밖에 없다"며 "애 병원 때문에 미팅을 바꾸는 게 가능한 회사와 '그걸 꼭 네가 가야 해?'라는 피드백을 주는 회사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대신 유연근무를 한다고 해서 근무를 소홀히 하거나 성과가 미흡하게 되면 이러한 근무 제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구성원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만큼, 서로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인다. 이재경 핀다 인사 총괄은 "제도를 잘 활용하고 있다 보니 육아 때문에 업무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각자가 더 챙긴다"며 "아이가 있으니 70%밖에 못하는 모습이 나오면 (제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일을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코니바이에린의 전민지 MD는 "아이가 2명이지만 아이 낳았다고 무조건 배려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회사에서 월급 받는 프로라면 당연히 주어진 업무에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 워킹맘도 일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진 않다"며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고 업무 결과의 품질로 판단하는 기업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LG디스플레이의 김지숙 책임은 "육아는 이제 남녀의 문제가 아니며 (이러한 제도는) 맞벌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부모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라며 "리더들이 좋은 제도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해주고 실행하게끔 도와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K인구전략-양성평등이 답이다' 김유리·이현주·정현진·부애리·공병선·박준이·송승섭 기자

김필수 경제금융에디터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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